6월항쟁
정의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된 대규모 시민 항쟁.
관련 령상
시기
- 발생 : 1987년 6월 10일
- 종료 : 1987년 7월 9
발생 배경
1985년 2·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과정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경찰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군대의 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 과연 군대가 전두환의 뜻대로 움직일지가 미지수였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6·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
결과 및 의의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실질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성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계급 문제 등에서 많은 갈등과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