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李容翊)
목차
이용익(李容翊)
한 줄 소개
대한제국 때, 내장원경, 탁지부대신,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여 근대 개혁에 기여한 관료.
생애
- 1854년[1]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
-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
- 고종의 신임을 받아 단천[2] 감역, 탁지부대신, 서북철도국총재,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
-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 돌아와서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비로 보성소학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3]를 설립하여 인재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 외에도 편집소 보성관, 인쇄소 보성사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
-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들고 프랑스로 원조 요청을 하러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옌타이항에서 6월에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
- 그 후 해외를 망명하며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4]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
이용익은 고종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임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돈줄을 맡긴 것도 맞지만,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최고 권력에 다가서게 된 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단천 감역으로서 광산에서 채굴한 금덩어리를 고종에게 상납하여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그가 출세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관파천 이후였다. 당시 함경도 출신자들이 상당수 등용되면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용익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6년 8월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추원 의관에 등용되었다.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
하지만 그는 이렇게 벼락출세를 하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반발 역시 감당해야 했다.
1897년, 이윤용과 한규설 등의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이는 그가 반발에 부딪힌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5]
1900년 이용익은 중추원의장 정낙용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의정부 참정 조병식의 공격을 받았다.
가장 심한 공격은 1902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의정 윤용선 등 여러 대신들이 경운궁 대한문 밖에 연좌하면서 이용익에게 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고종 황제조차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그를 피신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이것으로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이용익은 안남미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군함을 타고 당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으로 건너가야만 했다.
이용익은 왜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을까?
정낙용은 그가 북쪽 변방의 천한 출신임에도 언사와 거동이 대단히 오만하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벼락출세를 질투한 것이다.
이용익이 공격당한 이유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용익이 맡은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찰이었다. 그는 당시 세금 상납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거나 세금 상납이 밀린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는 얄짤이 없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신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일들을 도맡아 왔고, 1903년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
이용익이 대신들의 미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용익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2주 만인 1904년 2월 22일, 일본으로 강제 압송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동만 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외부 번역관 이건춘을 중국 지부로 밀파하여 그곳에서 각국에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전문을 발송토록 하였는데, 이를 총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에 들어서면서 이용익을 군부대신, 원수부검사국총장 등 군직에 연이어 임명하였으며, 그는 야포용 탄약을 포함한 다량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등 전쟁 발발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를 납치해 간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날인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공수동맹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으로 압송됐을 당시 온갖 회유정책의 대상이 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일본에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까지도 일본은 그를 최선을 다해 방해했다. 그를 총애하던 고종 황제도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일제는 그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하였다. 그가 1905년 2월 경북관찰사에 임명되자 일진회를 동원하여 그의 부임을 물리적으로 막기까지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계속 정치를 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결국 그는 스스로 1905년 9월 국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 보성전문학교 설립
이용익은 일본으로 끌려간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6]
그는 귀국 후 '교육구국'을 다짐하며 보성학교와 보성사를 설립하는 등 문화계몽사업에 주력하며, 소학교부터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은 그가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이듬해이다. 그는 체류 중에는 일본의 근대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았고, 귀국할 때에는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사비로 구입해 왔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신교육기관을 창설하려는 의도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이용익은 고종에게 학교의 설립 계획을 알렸고,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7]
1905년 4월 3일, 보성전문학교는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개교했다. 당시에는 정부 조직과 상통하도록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과로 구성된 2년제 전문학교로 시작되었다.
보성전문학교는 형식상 사립학교였음에도 황실의 막대한 지원금으로 운영돼 거의 황립학교에 가까웠다.[8] 이것이 감사했던 이용익은 고종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보성전문학교의 특별한 위상을 표현하고자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학교의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있는 이용익의 흉상>
평가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대학 설립자 이용익은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후손이 국가보훈처에 이용익 선생에 대한 기록이 적힌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건을 모두 제출했는데도 독립운동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계속 서훈 신청을 거절당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사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자료는 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해야 할 역할인데 자료를 줘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실정"이라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이용익이 천민이고 무식한 사람이라며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정말 무식했다면 결코 그 많은 관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식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게 됐을까?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라는 책에서는, 이용익의 출신과 성장을 놓고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 이유로, '1876년 전후에 팽배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밑바탕으로 한 이용익의 승승장구에 대한 질투심과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 일진회와 실체가 왜곡돼 이완용, 윤치호 등 친일세력이 활동한 독립협회 모략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