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
개요
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으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힘을 합쳐 창간하였다.
신문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었고, 한글본과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1]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특파원으로 머무르던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을 비롯하여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시대에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었다.
창간 당시에는 화합을 추구한 대한제국, 일본, 러시아의 각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했지만,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일 신문으로 전향하였다. 그 당시 일본이 사실상 언론의 검열을 맡았던 시기임에도 반발이 가능했던 것은 발행인 베델이 일본과 동맹국인 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는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2]
광고료
신문은 정보 전달 매체로서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기업(私企業)처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신문사가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신문사는 기본적으로 구독 수입으로 경영을 해야 하지만 이는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에 신문사는 구독 수입 외에 광고 수입을 통해 경영의 합리화를 추구한다.
당시 신문사의 광고료 계산 단위는 ‘1단 1행’ 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식인 인치(inch)를 사용하였다. 1904년 7월 창간 당시 광고료에 대해서는 영문판에“1일 1인치 또는 1인치 이하 50전(錢), 1개월간 매일 1인치 5원(圓), 1년간 매일 1인치 50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복간한 1905년 8월에는“1일 1인치 25전(錢, 新貨), 2주일 2원(圓) 50전, 1개월 5원”으로 조정하였다.
활동시기
연도 | 활동 | 설명 |
---|---|---|
1904.07.18 |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날 |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만든 민족적인 신문 |
1906.02 | 통감부 설립된 연도 |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 약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국 |
1907.02 |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날 |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것으로, 이와 관련된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서 다루었으며 항일운동을 지속 |
쇠퇴와 변화
의의
-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