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李容翊
기본정보
이용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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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한자)표기 | 李容翊 | |
호 | 석현(石峴) | |
출생 | 1854년 | |
사망 | 1907년 | |
묘소 | . | |
관련링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66 |
약력
일자 | 직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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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 감역(監役) |
1883년 | 단천부사(端川府使) |
1885년 | 북청부사(北靑府使) |
1887년 | 영흥부사(永興府使),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1894년 | 함경도 광무(鑛務) 관리[2],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1896년 | 여러 지역의 광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음, 평안북도관찰사(觀察使) |
1897년 |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탁지부(度支部) 전환국장, 유배 |
1899년 | 내장원경(內藏院卿) |
생애
1. 출생
1854년 1월 6일, 함경북도 명천(鳴川)에서 아버지 이병효(李秉斅)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2. 성장
- 5~15세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 20대 초까지 주자학자 초병덕(楚秉悳)의 지도로 학문을 배웠다.
- 21세에 학문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 이후 정계에 진출 전까지 보부상(褓負商)이나 물장수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다.
3. 정계 진출 및 이후 행보
- 첫 임명: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감역(監役)으로 임명된다.
- 고종의 신뢰: 정계 진출 후 금 채굴과 고종의 화폐제도 의견 지지를 바탕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는다.
- 위기: 1888년 민란을 이유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서 탄핵당한 후, 유배를 간다. 이후 1890년에 재복귀하지만 1896년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또다시 유배를 간다.
- 광산경영: 그의 광산 경영 능력이 인정받아, 여러 자리를 거쳐 전국 광산을 관리하기에까지 이른다.
- 왕실재정 관리: 1899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임명된다. 이는 당시 왕실 재정 관리 최고 책임자의 직급이다.
4. 일제의 납치
- 러일 전쟁: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 점점 더 확장되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싶었던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 또, 조선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 체결을 하려 노력한다.
- 일제와 대척하는 이용익: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국외중립 선언을 해외에 전달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또, 한일의정서 체결과 관련해서도 반대하였다.
- 강제 일본 압송: 이를 의식한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일본으로 이용익을 강제 압송한다.
- 귀환: 1904년 12월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5. 교육에 관한 관심
- 선진문물을 접하다: 감금 기간동안 이용익은 일본에서 선진문물 및 선진교육제도를 접한다. 이에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를 구입하여 들여왔다.
- 교육구국: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 학교설립: 보성학교 7개소 설립을 계획하고 실천<?span>하였다. 이에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 및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설립한다.
6. 일본의 지속적인 공격
7. 고종의 임무
-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해외에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조약이었음을 피력하려 노력한다. 이것의 일환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인물들이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로 일명 '헤이그 특사'이다.
- 이러한 외교 역할을 고종은 이용익에게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종의 밀령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가 외교활동을 하려 노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이 과정에서 190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체류하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황실에서는 그의 시호로 충숙(忠肅)을 하사하였다.
평가
1. 부정적 평가
- 친러파 인물이다.
- 명성황후 일가에 의지하여 권력을 얻은 인물이다.
-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당시 탐욕에 기반한 정치로 인해 민란을 일으켰다.
2. 긍정적 평가
- 일제가 견제할 정도로 일제의 침탈에 강경하게 맞서 싸운 인물이다.
- 그의 손자 이종호 (李鍾浩) 또한 독립운동을 지속했으며 이용익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2대 교주가 된다.
- 친러파는 친일파의 모함으로 인해 빚어진 오해이다.[3]
각주
- ↑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 ↑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임명
- ↑ 최재원 기사 중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사하신 후, 친일파들의 갖은 모함을 받고 '친러파'로 낙인찍히셨다" 참조
참고문헌
- 오연숙, 「大韓帝國期 李容翊 硏究 : 議政府와 宮內府의 勅任官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91.
-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 이용익 (李容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66, 접속일: 2024. 12. 20.
- 최재원,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OhmyNews』, 2005. 03. 21.,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3838, 접속일: 2024.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