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경원원소도감의궤
목차
기본정보
환수일자 | 1993.09.16 |
환수주체 | 김영삼 정부 |
환수경로 | 대여(프랑스) |
제작시기 | 조선시대 |
형태 | 문서 |
현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
조선 왕조 왕실 의궤이자,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외규장각 의궤이다.
외관
형태
국가에서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그 행사의 준비와 과정들을 정리한 기록물인 의궤이다. 같은 내용의 의궤가 분상용 의궤[1]와 어람용 의궤[2]로 나뉘어 여러개가 제작되었는데, 병인양요 때 반출되었다가 반환한 것은 어람용 의궤이다.
내용
순조 22년 정조의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의 장례 절차와 묘소인 휘경원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유출과 환수 스토리
유출 경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와중 강화행궁과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 의궤들을 약탈해 갔다. 그 후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환수 과정
프랑스(FRANCE) 국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수장고에 외규장각 의궤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반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1993년 9월 방한하여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외규장각 의궤 중 한 권을 건네주었고, 이 의궤가 바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였다.
의미와 중요성
외규장각 의궤 환수는 한국 내에서는 문화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문화유산들을 환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문화재 보존에 관한 법률들도 이 때 개정되거나 만들어졌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는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례가 되어, 각국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약탈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방법이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3년)’로 독특한 반환의 방법이다. 이는 ‘문화유산 반환’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국내법상 사용할 수 없고, ‘영구임대’는 당시 의궤를 소장하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저런 이상한 형식으로 환수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갱신 기간마다 프랑스에게 임대료까지 지불해야하는 조건이다. 이를 두고 당시에도 ‘문화유산이 한국 땅으로 들어왔으니 실리적으로 성공한 협상이다’라는 의견과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지 못한 실패한 협상이다.’라는 의견이 대립하였습다. 이후에 환수된 문화유산들의 경우에도 매입이나 기증으로 소유권을 완전히 되찾은 경우도 있지만 임대의 형식으로 가져온 것들도 많다. 문화유산 환수 과정에서‘실리’와‘명분'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남기게 되었다.
환수 후의 활용과 보존
보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시와 연구
문화유산 환수에서 워낙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례이기 때문에 꾸준히 학자들에게 연구되었으며, 연구 결과도 대중들에게 바로바로 공개되었다.
이명박 정부 때 모든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2011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개최하여 전시되기도 하였다.
관련 에피소드
의궤와 고속열차
먼저 프랑스가 이 의궤들을 돌려준 이유에 대해서 재밌는 추정이 있다. 바로 기차를 팔기 위해서 였다는 추정이다. 당시 경기 침체로 미테랑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덜어진 상황에서[3],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미끼로 한국에 프랑스 기차를 팔아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을 대표하는 열차인 KTX가 이 때 만들어졌는데, 프랑스 고속열차 TGV의 기술을 수입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 당시 프랑스 내부에서 의궤 반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있던 상황이라 미테랑이 굳이 반환을 약속한 것에 대해 이러한 일종의 뒷거래가 있지 않았겠냐는 추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
참고 문헌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