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목차
기본정보
명신여학교 | ||
---|---|---|
한자표기 | 明新女學校 | |
설립일 | 1906년 5월 22일 | |
설립자 | 순헌황귀비 | |
설립위치 | 용동궁(서울 종로구) | |
계승 |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중학교 | |
관련링크 | https://www.sookmyung.ac.kr/kr/intro/short-history.do |
본 위키페이지는 기획의도에 맞추어 1945년 광복 이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설립
설립목적
여성인재양성
설립배경
1. 여권론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 대두
『독립신문』은 다수의 글을 통해 개화를 위해서는 교육이 급선무라는 논조를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이때, 여성교육의 필요성 역시 여러 글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졍부에셔 학교 몃츨 지금 시쟉하야 아해들을 가르치나 계집 아해 가르치는 학교는 업스니 졍부에셔 백셩의 자식들을 교휵 할때 엇지 남녀가 층등이잇게 하리요 계집 아해들은 죠션 아해가 아니며 죠션 인민의 자식 되기는 일반이어늘 오라비는 졍부 학교에 가셔 공부하는 권이 잇스되 불샹한 계집 아해는 집에 가두워 노코 가르치는 거슨 다만 사나희에게 죵 노릇 할 직무만가르치니 우리는 그계집 아해들을 위하야 분히 넉이노라 | ||
출처:「논설」, 『독립신문』, 1896.5.12.[1] |
부문화의 진퇴와 풍속의 륭오와 종류의 강약과 사회의 흥쇠가 실로 여자의게 관계가 있는 고로 여자의 교육은 세계의 정신이오 일국의 명맥이라 지금에 한청량국이 현세계신문화의 풍조를 비부점피로되 상차개명진보가 부승기지지는 무타라 여자교육을 부립한 연고라. | ||
출처:「여학의흥(女學宜興)」,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1905.12.8.[2] |
위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다수의 지식인이 점차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2. 민족 설립 여성 교육 기관의 부족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교육구국의 정신이 확산되어 많은 민족 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남성을 가르치는 데에 치중되어 있었고, 당시 여성교육을 담당하는 축은 우리 민족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였다. 개화기 사립여학교 현황에 따르면, 1886년부터 1908년까지 기독교계 사립여학교는 약 29개교에 달했으나, 민간인 사립여학교는 약 12개교에서 그쳤다.</sapn>[3] 엄 귀비는 이러한 당시 현실을 인지하고, 민족이 설립한 학교로 여성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3. 귀족 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 목적인 '여성 교육'은 초기에는 그 대상이 귀족 여성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귀비 전하께오서 일본의 모범을 모방하여 귀족부인학교를 설립하고 각 대신의 따님들을 모집 교육하시기로 하여...(대한일보 1906.4.24), 여학교 모집규칙은 일본 화족여학교를 모방하여 설립하는데 여자 8세 이상으로 15세 이하를 모집한다더라 | ||
출처:『제국신문』, 1906. 4. 25.[4] |
윗글에서 알 수 있듯, 명신여학교는 일본의 여성귀족학교인 '화족여학교'를 모방하여 설립되었으며, 모집 대상이 대신의 자녀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연혁
일자 | 설명 |
---|---|
1906. 5 22. |
|
1908. 12 | ‘명신고등여학교(明新高等女學校)’로 개칭 |
1909. 5 |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等女學校)로 개편 |
1911. 11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로 개편 |
1912. 1 | 재단법인 숙명학원 설립 |
1936.[6] |
|
1938. 12 | 재단법인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설립인가 |
1939. 4 | 서울 용산구 청파동 (현재 위치 동.)에 가사과·기예과 각 40명, 전수과 50명으로 개교 |
1945. 11 | 광복 후 초대 교장에 임숙재(任淑宰)가 취임 |
1948. 5. 22. | 숙명여자대학으로 승격 |
1955. 3 |
|
역대 교장
관련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가
숙명여고보 제1차 맹휴 사건
- 1927년 5월부터 약 4개월 동안 전개된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분노한 숙명여고보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한 사건이다.
- 학생 항일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1930년 1월)
-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 독립운동 중 하나이다.
- 숙명여고보 4학년 조금옥·박선봉·윤을희 등의 주도로 숙명여고보 학생들이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 참여 과정에서 이화, 동덕, 배화 등 다른 여학교와의 협력도 있었다.
박자혜(朴慈惠)
- 간우회(看友會) 창설 후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 간호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파업하도록 주도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 신채호(申采浩)와 결혼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1911년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김종진
-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 항일결사조직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각주
- ↑ 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32쪽. 해당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현대어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다.
- ↑ 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43쪽. 해당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현대어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다.
- ↑ 강혜경, "숙명여고보 맹휴사건으로 본 식민지 여성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268-269쪽. 참조
- ↑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제45집 2호,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2006, 229쪽. 해당 학술지의 인용문을 인용하였다.
- ↑ https://www.sookmyung.ac.kr/kr/intro/history01.do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 접속일: 2024. 11. 17. 참조
- ↑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5888&cid=46615&categoryId=46615
- ↑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B%A4_%EC%87%BC%EA%B3%A0
- ↑ 출처: https://www.sookmyung.ac.kr/kr/intro/introduction-presidents.do
- ↑ 1955년 3월에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 접속일: 2024. 11. 17.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연혁, https://www.sookmyung.ac.kr/kr/intro/short-history.do , 접속일: 2024. 11. 17.
- Young-Gwan Kim, 황실계보, 대한황실문화원, 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01_02.php , 접속일: 2024. 11. 17.
- 최시한, 인물로 보는 ‘숙명’의 역사_순헌황귀비, 숙명역사관, 2018. 5. 11., https://heritagehall.sookmyung.ac.kr/common/edu/edu03_view.asp?idx=44&page=1&b_search=&s_string= , 접속일: 2024. 11. 1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733 , 접속일: 2024. 11. 17.
- 임세은, 여성 독립운동가, 역사에서 지워진 위인, 숙대신보, 2019. 3. 3., https://news.sookmyung.ac.kr/news/articleView.html?idxno=5035 , 접속일: 2024. 11. 17.
-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195 - 239 쪽
- 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23-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