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기본정보
환수경로 | 미환수 ( 일본 ) |
시기 | 조선, 15세기 중반 |
형태 |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
현소장처 |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
15세기 최고의 화가, 안견의 작품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이다.
외관
형태
몽유도원도는 비단 바탕에 먹으로 채색한 것으로 전체 38.7 x 106.5cm 크기이다.
구성
몽유도원도에는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와 발문, 그리고 1450년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20여 명의 선비들과 1명의 고승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특징
그림의 줄거리가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로 진행되며 왼쪽의 현실세계와 오른쪽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왼쪽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른쪽의 대부분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법을 통해 표현하였다.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작과정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447년, 복숭아밭을 노니는 환상적인 꿈을 꾸었고 이를 잊지 못해 안견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했다.
안견은 3일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을 직접 써서 두루마리의 앞부분을 장식했고 기문에 작품의 제작 과정을 손수 적어둔 것이 특징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토대로 하여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이 들자마자 도달한 왼쪽 골짜기의 오솔길, 험하고 기괴한 바위산과 절벽,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복사꽃이 만발한 도원동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구성에 따라 산세가 달리 표현되어 현실과 이상의 대조를 이룬다. 안견은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본 산천의 형상을 비단 폭에 섬세하게 담아냈다.
조선 초 화단의 선구자, 안견
안견은 조선초기 세종부터 세조때까지 활동한 화가이다.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겼으며 그의 의뢰로 몽유도원도를 기른 화가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조선 초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조선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산수화에 특히 뛰어낳고 초상화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수묵화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세종 때 정4품 호군까지 무리하게 승진한 것을 보면 세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는 화원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든 후대의 화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안견을 기준으로 그림 실력을 평가하고 안견만도 못한데 더 높은 벼슬을 하려고 하니 심히 외람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안견의 아들 안소희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화원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안견은 세종의 총애로 화원이 오를 수 있는 관직 이상을 받았지만 아들에게 화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을 보면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견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은 여럿이 있지만, 안견이 그렸다고 확실시되는 그림으로 현존하는 것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