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dh_edu
소금토마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2일 (토) 15:42 판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배경)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한국광복군
상하이에서 활영한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모습이다.

개요

일제 강점기 시기 중국은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을 다양하게 지원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모두 반일 감정을 토대로 일제에 반격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이 지원을 준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우익 진영인 중화민국, 자유당 측이 한국광복군을 크게 지원하였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좌익 진영인 중국 공산당 측 역시 좌익 성향 독립 단체들을 지원한 바 있다.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배경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게 국권을 빼앗길 경술국치 무렵, 중국 역시 일본의 침략 야욕을 받아내고 있었다.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중국과 조선의 양 국민이 힘을 합쳐야지 일제 타도 및 해방을 이룰 수 있음을 인식한 이후 두 나라 간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한국의 여러 독립단체, 독립투사 및 운동가들은 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으로 넘어가 활동을 시작하자 중국은 이를 도왔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이 수립된 이후 중국의 임정을 향한 지원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이해관계

미국은 초반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크게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따라서 한국의 참전 제안에 미온적이었으나,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파병 요청을 하게 되며, 한국의 파병 요청에 대한 태도도 바뀐다. 또한, 자국 내 반전시위가 격화되어 병력 차출이 어려워지자, 파병 필요성이 커졌고 한국군은 같은 아시아인이면서도 유지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파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파병 규모

누계 합산 30만 이상 병력을 약 8년 6개월 동안 베트남에 파병했다.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해 베트남 특수가 왔고 신흥 대기업이 성장하는 등 한국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인이나 노동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거나, 노동자들이 빌딩에 불을 지르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전투 파병 인원과 그로 인한 공백을 메울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21~30살의 청년들을 징병했다. 이 과정에서 징병 기피자들, 24살 이상 대학생들, 장기 휴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집요하게 징병하였고 예비역을 재입대 시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저항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대 중 하나인 20대 남성 청년 세대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원활한 징병 등 여러 이유를 근거로 주민등록법을 시행하여, 전 세대를 대상으로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통제 시스템은 차후 박정희 정권의 유신 개헌에 대한 반대를 용이하게 통제하도록 했고 독재 체제 강화 및 유지의 밑거름이 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베트남전의 영향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베트남전쟁 파병" 참조>> <<베트남전의 파병 배경과 관련하여는 우리역사넷, "월남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노도희. (2015). 박정희 대통령의 베트남 파병에 내포된 국가정체성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http://www.riss.kr/link?id=T13819087 참조 >>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