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요약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
배경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경과
운요호 사건의 경과
서구 열강의 포함외교에 의해 개항했던 경험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해 일본은 해군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파견된 배가 운요호이다. 운요호는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이다. 일본은 운요호를 부산에 침입시켰고 이에 대해 조선은 항의했지만, 일본 측은 외교사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9일 군함 제2테이묘호가 부산항으로 들어와 합류했고 두 군함이 함포사격을 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된다.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해안에 정박했다가 선원 일부가 사전 예고 없이 배로 한강 하구를 거슬러 향해하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하였다. 운요호 또한 함포사격을 하여 다수의 민간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이어진 일본의 개항요구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게 물었다.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강제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게 된다.
조선에 미친 영향
조선의 포격은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 포격으로 인해 운요호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강제 개항을 하게 된다.
운요호 사건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이래로 조선이 계속해오던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德川막부의 천주교 禁敎정책에 관하여는 Jurgis Elisonas, “Chirstianity and Daimyo” in John Whitney Hall.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Vol. 4, pp.301∼372 참조.>> <<德川시대 말기 일본의 국내정세에 관하여는 William G. Beasely, “The Meili Restoration”(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 1972), pp.74∼9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