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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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su0506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1일 (월) 15:52 판 (「대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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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정의

조선 말 일본이 한국주권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척권을 강제로 요구해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항일운동을 일컫는 총칭이다.
1904년에 발생했으며, 사회운동 성격을 띈다.


배경



제1차 한일의정서 체결

- 일제는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키기 위해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전쟁을 시작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군은 대한 제국 황제의 궁궐을 둘러싸고 무력 위협의 분위기 속에서 소위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 제1차 한일의정서는 한국의 ‘시정(施政)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한 제국에 대한 일본의 내정간섭, 군사전략상 필요한 토지 수용권, 내란 등의 위험이 있는 경우 일본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시행, 러시아와의 협정 체결 배제 및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게 협력할 것 등을 규정한 침략적인 협정이었다. 한국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한정책」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현지 정세 조사를 위해 3월 10일 내한했는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勸助)는 이때 이토에게 한국에서 획득해야 할 이권으로서 철도·해운·어업권·토지·우편·전신·광업 등을 건의했다. 이토는 귀국 즉시 이 건의안을 참작하여 「대한정책(對韓政策)」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작성하고, 1904년 5월 31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가결시켰다.

-「대한정책」의 골자

① 정치적으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예속시켜 일본이 실권을 장악한다.
② 경제적으로 이권을 획득하여 확대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대한시설강령〉에서 국방·외교·재정·교통·통신·척식(拓殖) 등에서 대한정책을 실천할 방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제6항인 척식 부문에서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 장악에 대해 규정하였다.


- 일제는 한국에서 일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사업은 농사라고 단정했다. 한국에 일본인이 진출함으로써 일본의 과잉 인구를 이식시킬 수 있는 땅을 얻고, 부족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 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또한 일본 농가를 위해 한국을 개방시키는 수단으로 두 가지 대책을 설정하였다. 하나는 일본인 개인 명의로 한국 정부로부터 관유(官有) 황무지를 경작 및 목축할 수 있는 특허나 위탁을 받고, 그것을 일본 정부의 관리 하에 일본인이 경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1리(里) 밖일지라도 민유지를 경작 또는 목축 등의 목적으로 일본인이 매매·임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주한일본공사는 대한 제국 궁내부에 어공원(御供院)을 신설하여, 전국의 황무지를 궁내부 소유로 하여 어공원이 관장케 하고 일본 측은 어공원과 계약하여 전국 황무지 개간권을 획득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했다.

계약서안

반대운동 시작


출처:네이버 시사상식사전

위 사진은 1904년 6월 20일에 작성된 황성신문으로,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에 대한 기사 사진이다.

결과

역사적 의의

  • 보안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은 정부 대신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구국민족운동으로 발전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좌절시켰다.
  • 이는 근대적 민중운동의 효시인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과 비견되는 전민족적 반침략운동이다.


참고문헌

  • 柳子厚,≪李儁先生傳≫(東方文化社, 1947), 103∼107쪽.

기여

  • 러일전쟁과 황무지 개간권에 대한 자료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러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지는 과정, 그리고 황무지 개간권에 대한 사횢거 사건들과 결과까지 흐름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 정보 수용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된 유튜브 링크를 첨부했고 중간에 외부 링크를 삽입해 전개 과정에서의 흥미를 이끌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