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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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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이상이 이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석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이 뒷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석탈해신화」는 시조신화일 뿐 건국신화는 아니다. 이것이 「박혁거세신화」·「동명왕신화」, 그리고 「김수로왕신화」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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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석탈해신화)]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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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7일 (수) 23:01 판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씨 왕조의 시조, 탈해


정의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 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탈해왕과 김수로왕의 왕위 싸움’에 관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탈해왕 조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어느 날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를 열자 안에는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여러 보물과 노비 둘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사내아이는.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나 버림받아 이곳에 닿았다.”라고 하였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종(從)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 곳에서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찾은 뒤, 호공(瓠公)의 집에 갔다. 아이는 속임수를 써서 호공 집 곁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었다. 다음 날 아침 호공 집에 가서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라 우겼다. 그리고 관가에 고발하여 “나는 본래 대장장이로,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자가 차지한 것이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숫돌과 숯이 있어서, 아이가 호공의 집을 차지하였다. 이 사내아이가 탈해이다.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로움을 알고, 맏사위로 삼았다.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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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이상이 이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석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이 뒷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석탈해신화」는 시조신화일 뿐 건국신화는 아니다. 이것이 「박혁거세신화」·「동명왕신화」, 그리고 「김수로왕신화」와 다른 점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석탈해신화)]

분석

이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한 사정을 볼 때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석탈해와 그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은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둘째는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이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은 탈해가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임을 말한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곧 무당을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를 소상으로 모신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ongon, 신체를 깃털, 천, 가죽, 나무로도 만듦)’에 비교될 수 있다. 또한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석탈해신화>는 서사문학상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영웅의 일생’의 전기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모티프

천손하강 모티프와 난생설화 모티프


박혁거세 신화는 천손하강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에서 내리뻗은 번개불 같은 이상한 기운, 백마, 자줏빛, 난생, 시조의 몸에서 나는 광채, 천지 진동과 일월의 청명 등에서 천신적 면모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며 태양신 성격’을 지닌다.

또한, 박혁거세 신화는 난생설화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자줏빛 알을 깨고 태어난 사내 아이라는 점에서, 난생설화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천손하강 모티프와 더불어, 박혁거세가 태어난'알'은 천신적 성격을 지닌 주몽과 수로의 '알'처럼 태양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천손하강 모티프와 난생설화 모티프의 이러한 성격은 박혁거세의 탄생에 정당성을 부여해 신라 왕권을 신성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의의와 평가

<석탈해신화>는 신라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석씨 왕가의 시조신화로, 이와 유사한 것은 김씨 왕가의 시조신화인 <김알지신화>가 있다. 아울러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성씨시조신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신화는 건국시조신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탈해가 야무왕의 성격을 지니고, 고대국가 초기에 왕과 샤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사후의 이중장 및 남성 신격의 산신화라는 민속적 사례를 제공하여 한국 서사문학상 풍부한 내용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석탈해 일대기

(타임라인)

석탈해 신화 발원지

참고문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석탈해신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탈해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