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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신화에서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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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한 사정을 볼 때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석탈해와 그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은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① '''한국 고대 건국신화와 마찬가지로 '천신이 하강하여 건국하였다.' 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혁거세도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며 태양신 성격’을 지닌다. 가령 하늘에서 내리뻗은 번개불 같은 이상한 기운, 백마, 자줏빛, 난생, 시조의 몸에서 나는 광채, 천지 진동과 일월의 청명 등에서 천신적 면모를 찾을 수 있고, 난생의 ‘알’은 천신적 성격을 지닌 주몽․수로의 ‘알’과 같이 태양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신라 왕권을 신성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혁거세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불구내왕(弗矩內王), 곧 밝은 왕으로서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光明理世]’는 의미를 지닌 것을 보아 그러하다. 이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에 보이는 ‘홍익인간’의 이념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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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이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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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은 탈해가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임을 말한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무당을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② '''동명왕이나 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다 같은 난생(卵生)인데, 박혁거세의 알은 박에 견주어져 있다.''' 이 신화에는 시조의 탄생과 동시에 왕비 알영의 탄생이 설정되어, ‘남녀의 신성혼과 등극’이 중시되고 있다. 이러한 남녀의 상호 대등한 관계는 환웅과 웅녀, 해모수와 하백녀 유화가 천상적 남성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부부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곧 혁거세 집단이 경주 지역에 이주한 뒤, 알영 집단과 혼인 동맹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신화에서 6촌의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혁거세를 받들어 왕으로 삼는 것은, 씨족사회가 연합하여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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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③ '''혁거세의 강림 장소가 ‘산’이 아닌 ‘우물[나정]’이며, 알영 비의 탄생지 역시 ‘우물[알영정]’이다.''' 이는 신라 초기부터 우물이 성역이었음을 뜻하고, 우물은 농경사회의 정착민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 마을 굿에서 당산나무와 우물은 제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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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은 자의 뼈를 소상으로 모신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ongon, 신체를 깃털, 천, 가죽, 나무로도 만듦)’에 비교될 수 있다. 또한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석탈해신화>는 서사문학상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영웅의 일생’의 전기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④ '''혁거세와 알영이 각각 왕과 왕비가 되는 조건으로 ‘덕(德)’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통치자의 신이한 능력보다는 도덕적인 우월함이 새롭게 중시되는 인간 세상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⑤ '''닭의 부리같은 알영의 입술이 뒤늦게 떨어진다는 모티프는 주몽신화에서 유화가 입술이 길어 세 번 자른 뒤 말할 수 있었다는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여성의 입사식(入社式)’ 절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⑥ '''박혁거세 주검의 산락(散落)과 왕비와의 합장을 뱀의 방해로 하지 못해 다섯 능으로 나누어 매장하는 내용은 한국 건국신화에 유례가 없다.''' 이에 대해 대부분 ‘풍요를 위한 농경의례의 하나’로 설명하지만, 더러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성무식(成巫式)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체 분리의 모티프’와 대응시켜 논의하기도 한다.
 
  
 
==모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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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7일 (수) 22:59 판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씨 왕조의 시조, 탈해


정의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 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탈해왕과 김수로왕의 왕위 싸움’에 관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탈해왕 조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어느 날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를 열자 안에는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여러 보물과 노비 둘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사내아이는.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나 버림받아 이곳에 닿았다.”라고 하였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종(從)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 곳에서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찾은 뒤, 호공(瓠公)의 집에 갔다. 아이는 속임수를 써서 호공 집 곁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었다. 다음 날 아침 호공 집에 가서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라 우겼다. 그리고 관가에 고발하여 “나는 본래 대장장이로,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자가 차지한 것이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숫돌과 숯이 있어서, 아이가 호공의 집을 차지하였다. 이 사내아이가 탈해이다.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로움을 알고, 맏사위로 삼았다.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분석

이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한 사정을 볼 때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석탈해와 그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은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둘째는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이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은 탈해가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임을 말한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곧 무당을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를 소상으로 모신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ongon, 신체를 깃털, 천, 가죽, 나무로도 만듦)’에 비교될 수 있다. 또한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석탈해신화>는 서사문학상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영웅의 일생’의 전기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모티프

천손하강 모티프와 난생설화 모티프


박혁거세 신화는 천손하강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에서 내리뻗은 번개불 같은 이상한 기운, 백마, 자줏빛, 난생, 시조의 몸에서 나는 광채, 천지 진동과 일월의 청명 등에서 천신적 면모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며 태양신 성격’을 지닌다.

또한, 박혁거세 신화는 난생설화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자줏빛 알을 깨고 태어난 사내 아이라는 점에서, 난생설화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천손하강 모티프와 더불어, 박혁거세가 태어난'알'은 천신적 성격을 지닌 주몽과 수로의 '알'처럼 태양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천손하강 모티프와 난생설화 모티프의 이러한 성격은 박혁거세의 탄생에 정당성을 부여해 신라 왕권을 신성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의의와 평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혁거세신화>는 한국 고대 건국신화의 전통을 잘 따르고 있으면서도, ‘하강한 운반체를 통한 난생과 부부 신성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북방 지역 건국신화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면은 같은 남방 지역의 건국신화인 금관가야 김수로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아울러, ‘선도산 여산신이 신라 건국시조인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다.’라는 내용의 신화가 전승되고 있는데, 이는 지배층이 천신계 건국신화를 전승하는 것과 달리 토착 집단에서는 산신숭배에 따른 지모신 계통의 신화를 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석탈해 일대기

(타임라인)

석탈해 신화 발원지

참고문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석탈해신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탈해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