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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호 = 자관(子觀), 학암(鶴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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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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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일제강점기 항일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혁명가이자,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한 정치인이다. 울산의 유복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노동자와 기민을 위해 살았으며, 일제강점기 말기 가장 치열하게 변절하지 않고 투쟁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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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주요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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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기와 교육 (1902~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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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경상남도 울산군(현 울산광역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 지리박물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유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으며, 귀국 후 1929년부터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와 박물 교사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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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과 투옥 (1929~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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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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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콤그룹 활동''': 1930년대 중반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지하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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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배와 도피''':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전향하지 않았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대부분의 지식인이 변절할 때도 그는 끝까지 지하에서 노동운동과 항일 투쟁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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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신 장수 위장''': 수배 중에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고무신 장수, 땜장이 등으로 변장하며 민중 속에 숨어 활동한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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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의 정치활동 (1945~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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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재정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당시 그는 대중적인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해방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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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비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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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 군정은 조선공산당이 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찍어냈다고 발표하였고, 이관술은 주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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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논란''': 이 사건은 당시 좌익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미 군정과 우익 세력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설과 실제 당 차원의 개입이 있었다는 설이 현재까지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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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과 수감''':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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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와 사망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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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던 남한 당국에 의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에 대한 처형이 집행되었다. 이관술 역시 대전 골령골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였으며, 오랜 시간 동안 현대사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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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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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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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한 항일 투사''': 일제강점기 말기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항일의 절개를 지킨 점은 좌우를 막론하고 높게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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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자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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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복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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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위조지폐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2000년대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와 학계의 연구를 통해 그의 항일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2025년 12월 23일 (화) 15:46 기준 최신판


개요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항일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혁명가이자,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한 정치인이다. 울산의 유복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노동자와 기민을 위해 살았으며, 일제강점기 말기 가장 치열하게 변절하지 않고 투쟁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생애 및 주요 활동

성장기와 교육 (1902~1928)

1902년 경상남도 울산군(현 울산광역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 지리박물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유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으며, 귀국 후 1929년부터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와 박물 교사로 재직하였다.

항일운동과 투옥 (1929~1945)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 경성콤그룹 활동: 1930년대 중반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지하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 수배와 도피: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전향하지 않았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대부분의 지식인이 변절할 때도 그는 끝까지 지하에서 노동운동과 항일 투쟁을 지속하였다.
  • 고무신 장수 위장: 수배 중에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고무신 장수, 땜장이 등으로 변장하며 민중 속에 숨어 활동한 일화가 유명하다.

해방 직후의 정치활동 (1945~1946)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재정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당시 그는 대중적인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해방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비극

1946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 군정은 조선공산당이 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찍어냈다고 발표하였고, 이관술은 주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 사건의 논란: 이 사건은 당시 좌익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미 군정과 우익 세력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설과 실제 당 차원의 개입이 있었다는 설이 현재까지 대립하고 있다.
  • 재판과 수감: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최후와 사망 (1950)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던 남한 당국에 의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에 대한 처형이 집행되었다. 이관술 역시 대전 골령골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였으며, 오랜 시간 동안 현대사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평가 및 의의

긍정적 평가

  • 철저한 항일 투사: 일제강점기 말기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항일의 절개를 지킨 점은 좌우를 막론하고 높게 평가받는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자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역사적 복권

해방 정국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위조지폐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2000년대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와 학계의 연구를 통해 그의 항일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