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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은 1930년 북만주에서 지청천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정당으로 활동했다. | 한국독립당은 1930년 북만주에서 지청천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정당으로 활동했다. | ||
2025년 11월 27일 (목) 17:50 판
목차
개요
정의
한국독립당은 1930년 북만주에서 지청천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정당으로 활동했다.
창당 배경
1928~1929년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이 전개되며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시도가 있었고, 협의회파(정의부 중심)와 촉성회파(혁신의회 중심)로 나뉘어 각자의 통합 세력을 형성하였다. 북만주 혁신의회 세력이 신민부 중심으로 규합되며 한국독립당 창당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창당 과정
1930년 7월 북만주 한족자치연합회와 생육사를 모체로 지청천이 주도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협의회파가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한 이후 북만주에서는 이에 대응해 한국독립당이 출범했다.
한국독립군과의 관계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총사령관은 군사위원장 지청천이 겸임했다. 한국독립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26개 군구를 설치하고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펼치며 일제에 맞서 싸웠다.
임시정부와의 관계
1930년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결성되었으며 이동녕, 안창호, 이유필, 김두봉, 안공근, 조완구, 조소앙 등 임정 핵심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중국 국민당식 이당치국 체제를 표방했으나 점차 임시정부의 여당 형태로 자리 잡았다.
활동
조선민족혁명당 통합 (1935년)
1935년 5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
한국독립당 재건 (1935년)
조소앙 등은 1935년 9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사회주의 세력 중심으로 움직이자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김구는 이를 거부하고 별도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광복운동 연합 활동 (1937~1940년)
1937년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 등 우익계열 단체들이 함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9년에는 좌우익 연합체인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임시정부 개편 주도 (1940년)
1940년 충칭으로 이동한 뒤 우익 3당이 통합되어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었고 임시정부의 공식 여당이 되었다. 이후 좌익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정에 참여하며 좌우 연합 형태가 되었다.
하와이 지부 활동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설치되었고 이승만, 서재필 등이 참여했다. 1945년까지 활발히 활동했으나 이후 이승만이 탈당하였다.
광복 이후 활동 (1945~1948년)
광복 후 한국민주당과 함께 양대 우익 정당으로 활동했으나 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 영향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도 강했다. 친일청산 문제로 한국민주당과 갈등도 있었다.
분열과 약화 (1947~1949년)
미소공위 문제로 내부가 분열되었고 혁신파·민주파 등이 탈당해 신한국민당·민주독립당을 결성했다. 김구 피살 후 결정적으로 세력이 와해되었다.
정부 수립 후와 소멸 (1948~1970년)
김구 사망 후 세력 약화, 이승만 정권의 탄압, 대중적 지지 부족으로 쇠퇴하였다. 1962년 재건했으나 선거마다 실패했고, 1970년 신민당 등에 흡수되며 사실상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