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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 05:50 판
작가
| 호 | 연암 |
| 자 | 미중, 중미 |
| 본관 | 반남 |
| 출생 | 1737 |
| 사망 | 1805 |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작성하였다.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1]
배경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부농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신분상승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몰락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양반전>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저자는 <양반전>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의의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
- ↑ [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