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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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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font color="#FF0000">'''계축옥사'''</fon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font color="#FF0000">'''계축옥사'''</fon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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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font color="#008000">'''이괄의 난'''</fon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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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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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font color="#B22222">'''공조참판'''</font>까지 벼슬이 올랐다.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font color="#B22222">'''공조참판'''</font>까지 벼슬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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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font color="#B22222">'''지중추부사'''</font>를 지내었다.<ref> </ref>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font color="#B22222">'''지중추부사'''</font>를 지내었다.<ref>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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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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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ins>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ins>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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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span style="background:#E0FFFF">'''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span>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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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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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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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
  
  

2025년 6월 24일 (화) 03:00 판

작가

조위한




지세
현곡
출생 1567(명종 22년)
사망 1649(인조 27년)
본관 한양
관직 공조참판, 지중추부사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계축옥사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공조참판까지 벼슬이 올랐다.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를 지내었다.[1]


사건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


심하 전투



심하전투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칠종뇌한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강홍립은 항복하였다.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내용

대략적인 내용

영상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