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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ref></ref> | + |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ref> </ref> |
2025년 6월 23일 (월) 15:05 판
목차
주요 키워드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 |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 |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 |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 |
정치적 변화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북벌론과 북학론
북벌론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북학론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1]
탕평책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2]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
사회적 변화
사상적 변화
문화사적 변화
각주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