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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 |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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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 |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 | ||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조선일보>,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 |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조선일보>,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 | ||
2025년 6월 20일 (금) 14:31 기준 최신판
| 사진 | |
|---|---|
| 출생 |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 |
| 사망 | 1950년경으로 추정 |
| 사인 | 불명 |
| 거주지 |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 경성부 ->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
| 국적 | 대한민국 |
| 본관 | 온양 |
| 별칭 | 호: 계초(啓礎), 춘해(春海) |
| 직업 | 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 |
| 배우자 | 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 |
| 자녀 | 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 |
| 부모 | 방계준(부), 온양박씨(모) |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1][2][3][4]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2][5]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성장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언론, 기업 활동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6]"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7]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8]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9]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10]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11][12]
언론, 사업 활동
사회사업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13]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14]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15]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16]
일제 강점기 후반
중일 전쟁 전후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17]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
조선일보 폐간 사건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18]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19]
잡지 발행 활동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20]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21]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22]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23]
광복 이후 활동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24]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납북과 최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
사후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
친일행위 의혹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반민족행위 논란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25][26]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27]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28]"는 것이다.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응모에게 적용된 모든 행위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 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29]
기타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30]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31]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32]
각주
- ↑ 안은필.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
- ↑ 2.0 2.1 안은필.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
- ↑ 이민영.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
- ↑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
- ↑ 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 ↑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
- ↑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
- ↑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
- ↑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
- ↑ 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
- ↑ "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
- ↑ 박설산 회고록 <뚜껑없는 조선역사책>(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
- ↑ 법원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뉴시스 2010년 12월 22일
- ↑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
- ↑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
- ↑ "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 조선일보, 2008-03-10 03:22
- ↑ 박설산 저 <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 p.226 도서출판 三藏(1994)
참고문헌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
외부링크
-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
- <조선일보>,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
-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긴급입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
- 그가 '<조선>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
-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
-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