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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음력 7월 12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고<ref name=":0">{{웹 인용 |url=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db=city_people&page=1&idx=3 |제목=한용운:홍성넷 |확인날짜=2013-05-2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35146/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db=city_people&page=1&idx=3 |보존날짜=2013-12-14 |url-status=dead }}</ref>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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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626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시집)|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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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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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년 자신에게 [[최남선]]을 언급한 [[김홍규 (1876년)|김홍규]]에게는 "아직도 최남선이 살아 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최남선이 자신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계속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면서 차갑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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