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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1일 (토) 01:20 판
양기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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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한자)표기 | Yang Gi-tak(梁起鐸) | |
호 | 우강(雩岡), 운강(雲崗) | |
출생 | 1871년 4월 2일 | |
사망 | 1938년 4월 19일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7호 | |
관련링크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2400&code=kc_age_40 |
개요
양기탁(梁起鐸, 1871~1938)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사상가로서, 특히 독립운동 초기 민족운동의 조직화와 언론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로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생애
탄생과 청년기
양기탁은 1871년 평안남도 강서군 용연면 신경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영국인 선교사가 저술한 한영자전 편찬을 보조했고, 영국인 기자인 E.T 베셀과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즈를 발간했다. 또한 궁궐에서도 영어에 능통함을 인정받아 궁내부 영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독립운동 전개
대한매일신보
1904년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발행이 멈춘 독립신문을 대신해 순한글과 영문판으로 발행하였다. 양기탁은 주필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있어서 언론 활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1907년에는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대한매일신보를 이용해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신민회 창립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를 통해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1915년 4월 출옥하여 북간도, 연해주방면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31년 11월 상하이오 도항한 이후, 1933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말년 및 사망
양기탁은 지속적인 투옥과 탄압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중국 장쑤 성에서 와병[1]을 앓다가 193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독립운동 초기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계적 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 ↑ 각종 병환으로 인해 앓아 눕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