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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 19:10 판
개요
장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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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한자)표기 | Chiang Kai-shek(蔣介石) | |
호 | - | |
출생 | 1887년 10월 31일 | |
사망 | 1975년 4월 5일 | |
묘소 | 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 | |
관련링크 | 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 |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약력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
생애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
출생과 성장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1차 국공합작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손‧요페 선언을 통해 수립되었다.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
국부천대와 대만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
한국과의 관계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
평가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긍정적 평가
<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
부정적 평가
<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처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
- 이상철, 「 <蔣介石일기>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