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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학의흥(女學宜興)」,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1905.12.8.<ref>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43쪽. 해당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현대어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다.</ref>}} | |출처= 「여학의흥(女學宜興)」,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1905.12.8.<ref>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43쪽. 해당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현대어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다.</ref>}} | ||
위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다수의 지식인들이 점차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br/> | 위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다수의 지식인들이 점차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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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 설립 여성 교육 기관의 부족'''<br/> | '''2. 민족 설립 여성 교육 기관의 부족'''<br/> | ||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교육구국의 정신이 확산되어 많은 민족 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남성을 가르치는 데에 치중되어 있었고, 당시 여성교육을 담당하는 축은 우리 민족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였다. 엄귀비는 이러한 당시 현실을 인지하고, 민족이 설립한 학교로 여성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교육구국의 정신이 확산되어 많은 민족 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남성을 가르치는 데에 치중되어 있었고, 당시 여성교육을 담당하는 축은 우리 민족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였다. 엄귀비는 이러한 당시 현실을 인지하고, 민족이 설립한 학교로 여성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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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 4. 24.}} |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 4. 24.}} | ||
이러한 엄귀비의 자각은 위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br/> | 이러한 엄귀비의 자각은 위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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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족 여학교'''<br/> | '''3. 귀족 여학교'''<br/> | ||
명신여학교의 설립 목적인 '여성 교육'은 초기에는 그 대상이 '''귀족 여성'''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명신여학교의 설립 목적인 '여성 교육'은 초기에는 그 대상이 '''귀족 여성'''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2024년 12월 20일 (금) 02:09 판
목차
기본정보
명신여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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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明新女學校 | |
설립일 | 1906년 5월 22일 | |
설립자 | 순헌황귀비 | |
설립위치 | 용동궁(서울 종로구) | |
계승 |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중학교 | |
관련링크 | https://www.sookmyung.ac.kr/kr/intro/short-history.do |
설립
설립목적
여성인재양성
설립배경
1. 여권론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 대두
『독립신문』은 다수의 글을 통해 개화를 위해서는 교육이 급선무라는 논조를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이때, 여성교육의 필요성 역시 여러 글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졍부에셔 학교 몃츨 지금 시쟉하야 아해들을 가르치나 계집 아해 가르치는 학교는 업스니 졍부에셔 백셩의 자식들을 교휵 할때 엇지 남녀가 층등이잇게 하리요 계집 아해들은 죠션 아해가 아니며 죠션 인민의 자식 되기는 일반이어늘 오라비는 졍부 학교에 가셔 공부하는 권이 잇스되 불샹한 계집 아해는 집에 가두워 노코 가르치는 거슨 다만 사나희에게 죵 노릇 할 직무만가르치니 우리는 그계집 아해들을 위하야 분히 넉이노라 | ||
출처:「논설」, 『독립신문』, 1896.5.12.[1] |
부문화의 진퇴와 풍속의 륭오와 종류의 강약과 사회의 흥쇠가 실로 여자의게 관계가 있는 고로 여자의 교육은 세계의 정신이오 일국의 명맥이라 지금에 한청량국이 현세계신문화의 풍조를 비부점피로되 상차개명진보가 부승기지지는 무타라 여자교육을 부립한 연고라. | ||
출처:「여학의흥(女學宜興)」,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1905.12.8.[2] |
위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다수의 지식인들이 점차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2. 민족 설립 여성 교육 기관의 부족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교육구국의 정신이 확산되어 많은 민족 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남성을 가르치는 데에 치중되어 있었고, 당시 여성교육을 담당하는 축은 우리 민족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였다. 엄귀비는 이러한 당시 현실을 인지하고, 민족이 설립한 학교로 여성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초반 순헌황귀비는 교육의 필요성에 대하여 절감하였다. 특히 여성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 ||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 4. 24. |
이러한 엄귀비의 자각은 위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 귀족 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 목적인 '여성 교육'은 초기에는 그 대상이 귀족 여성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귀비 전하께오서 일본의 모범을 모방하여 귀족부인학교를 설립하고 각 대신의 따님들을 모집 교육하시기로 하여...(대한일보 1906.4.24), 여학교 모집규칙은 일본 화족여학교를 모방하여 설립하는데 여자 8세 이상으로 15세 이하를 모집한다더라 | ||
출처:『제국신문』, 1906. 4. 25. |
위 글에서 알 수 있듯, 명신여학교는 일본의 여성귀족학교인 '화족여학교'를 모방하여 설립되었으며, 모집 대상이 대신의 자녀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연혁
일자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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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10일 |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뜻있는 각계 부인들을 모아 부인회 발회식을 거행하였다.(황성신문 1906.4.10) |
1906년 5월 22일 | 조선황실 순헌황귀비로부터 룡동궁지(구 교사 대지)와 경비보조를 받아 ‘명신여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 여사가 취임. |
1908년 12월 | ‘명신고등여학교(明新高等女學校)’로 개칭 |
1909년 5월 |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等女學校)로 개편 |
1911년 11월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로 개편 |
1912년 1월 | 경선궁 및 영친왕이 제공한 황해도, 전라남도, 경기도 등 3도내 신천, 은율, 안악, 재령, 파주, 완도 등 6군의 농경지 수익금으로 ‘재단법인 숙명학원’을 설립 |
1936년 | 숙명학원과 숙명고등여학교 졸업생 성의경(成義敬), 김현실(金縣實), 송금선(宋金璇), 이숙종(李淑鍾), 김성수(金性洙) 등 사회인사의 주도로 숙명여자전문학교창립추진위원회가 조직, 숙명여전 설립 모금운동 전개 |
1938년 12월 | 재단법인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설립인가 |
1939년 4월 | 서울 용산구 청파동 (현재 위치 동일)에 가사과·기예과 각 40명, 전수과 50명으로 개교 |
1945년 11월 | 광복 후 초대 교장에 임숙재(任淑宰)가 취임 |
1948년 5월 22일 | 숙명여자대학으로 승격 |
1955년 3월 | 종합대학인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개편, 초대 총장 임숙재 |
역대 교장
관련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가
박자혜 (朴慈惠)
-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하다가 간우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벌였고, 신채호(申采浩)와 결혼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간호사 · 독립운동가.
- 숙명여대와의 관련성: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 입학하여 1914년 졸업.
김종진
대동단 가입, 3·1 운동에 참여
숙명여고보 제1차 맹휴 사건(1927년 5월~ 9월)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분노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한 사건 (숙대신보 발췌: 맹휴 사건을 이끈 숙명여고보 19회 졸업생 장옥려를 포함한 학생들은 해당 일본인 교사의 사퇴와 조선인 교사의 채용, 학생 대우 개선 등 6개의 요구 조건을 걸고 126일간 동맹 휴학을 지속했다. 해당 사건은 민족독립을 위한 학생 항일운동의 본보기가 됐다.)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1930년 1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 독립운동
- 조금옥·박선봉·윤을희 등 숙명여고보 4학년 학생들의 주도로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
- 이화·동덕·배화 등 각 학교 대표들과 함께 여학생 궐기를 결의
각주
- ↑ 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32쪽. 해당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현대어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다.
- ↑ 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43쪽. 해당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현대어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다.
- ↑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5888&cid=46615&categoryId=46615
- ↑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B%A4_%EC%87%BC%EA%B3%A0
- ↑ 출처: https://www.sookmyung.ac.kr/kr/intro/introduction-presidents.do
- ↑ 1955년 3월에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 접속일: 2024. 11. 17.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연혁, https://www.sookmyung.ac.kr/kr/intro/short-history.do , 접속일: 2024. 11. 17.
- Young-Gwan Kim, 황실계보, 대한황실문화원, 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01_02.php , 접속일: 2024. 11. 17.
- 최시한, 인물로 보는 ‘숙명’의 역사_순헌황귀비, 숙명역사관, 2018. 5. 11., https://heritagehall.sookmyung.ac.kr/common/edu/edu03_view.asp?idx=44&page=1&b_search=&s_string= , 접속일: 2024. 11. 1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733 , 접속일: 2024. 11. 17.
- 임세은, 여성 독립운동가, 역사에서 지워진 위인, 숙대신보, 2019. 3. 3., https://news.sookmyung.ac.kr/news/articleView.html?idxno=5035 , 접속일: 2024. 11. 17.
-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195 - 239 쪽
- 김영민, “한국 근대 초기 여성담론의 생성과 변모 - 근대 초기 신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No.2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223-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