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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든 후대의 화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안견을 기준으로 그림 실력을 평가하고 안견만도 못한데 더 높은 벼슬을 하려고 하니 심히 외람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든 후대의 화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안견을 기준으로 그림 실력을 평가하고 안견만도 못한데 더 높은 벼슬을 하려고 하니 심히 외람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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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견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은 여럿이 있지만, 안견이 그렸다고 확실시되는 그림으로 현존하는 것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 | ||
===환수 시도=== | ===환수 시도=== |
2024년 11월 28일 (목) 17:42 판
기본 정보
환수경로 | 미환수 ( 일본 ) |
시기 | 조선, 15세기 중반 |
형태 |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 전체 38.7 x 106.5cm |
현소장처 |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
문화유산 소개
몽유도원도
조선 초 화단의 선구자, 안견
안견은 조선초기 세종부터 세조때까지 활동한 화가이다.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겼으며 그의 의뢰로 몽유도원도를 기른 화가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조선 초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조선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산수화에 특히 뛰어낳고 초상화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수묵화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세종 때 정4품 호군까지 무리하게 승진한 것을 보면 세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는 화원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든 후대의 화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안견을 기준으로 그림 실력을 평가하고 안견만도 못한데 더 높은 벼슬을 하려고 하니 심히 외람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안견의 아들 안소희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화원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안견은 세종의 총애로 화원이 오를 수 있는 관직 이상을 받았지만 아들에게 화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을 보면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견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은 여럿이 있지만, 안견이 그렸다고 확실시되는 그림으로 현존하는 것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