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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지역''':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 '''만주 지역''':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 '''중국 본토''':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
 
* '''중국 본토''':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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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을 건넌 명문가의 후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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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신민회(新民會) 총감독 양기탁(梁起鐸)은 자신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국외에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각 지역의 담당자를 선임하였는데, 이회영(李會榮)은 서간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은 즉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경비 마련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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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가 망하자, 9월 이회영은 독립군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함께 상인으로 변장한 이회영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를 시찰한 뒤 11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회영은 형제들을 모아 중국 망명을 제의하였고, 형제들은 선뜻 동의하였다. 이회영 일가는 당시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던 명문거족이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길에 모두 동참하였다. 이들 6형제는 망명 자금 마련을 위해 모든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 약 40만 냥, 오늘날 금액으로 약 600억 원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당시 백미 1석이 3원 남짓하던 시절이었다. 이 재산의 대부분은 고종(高宗)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李石榮)이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이 자금은 초기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의 초석을 닦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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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 30일,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 일가 50~60여 명은 예닐곱 대의 마차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2월 초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이회영 일가의 망명길을 전후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이동녕과 사촌 이장녕(李章寧) 일가, 장유순·장도순(張道淳)·장한순(張澣淳) 형제 일가, 김창환(金昌煥)·이관직(李觀稙)·윤기섭(尹琦燮)·여준(呂準)·주진수(朱鎭洙) 등이 망명하였고, 안동 일대에서는 이상룡(李相龍)·이준형(李濬衡) 부자와 이상룡의 동생 이봉희(李鳳羲)·이문형(李文衡) 부자 등 일가, 김대락(金大洛)·김형식(金衡植) 부자 일가, 김동삼(金東三) 일가와 문중 청년들, 유인식(柳寅植) 일가, 황호(黃濩)·황만영(黃萬英)·황도영(黃道英) 일가, 이원일(李源一) 일가, 이희영(李羲榮) 형제 일가가 동참하였다. 경북 선산에서는 허위(許蔿)의 처와 가족, 그리고 형 허혁(許赫) 일가, 허형(許衡)·허발(許坺) 부자 일가, 권팔도(權八道) 일가 등 전통 명문가 출신의 100여 가구가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 대열에 합류하였다. 안동 혁신유림들의 망명은 신민회원인 주진수·황만영을 통해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개척 소식을 전해 듣자, 이상룡·김대락·황호 등 세 문중의 원로가 나서며 추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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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학사-부민단-한족회로 이어지는 민단자치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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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2월부터 유하현 추가가에 정착한 이들은 4~5월경 추가가 마을 뒤편 대고산(大孤山)에 모여 노천대회(또는 군중대회)를 열었다. 3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다.’는 것과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 등 6형제와 서울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기하고 「경학사 취지서」를 작성·발표하여 경학사를 설립되었다. 경학사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이었다. 이 진용은 1912년 전반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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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11~12년 계속된 대흉년으로 재정 조달이 힘들게 되자, 경학사는 1912년 가을부터 사실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회영·이동녕·이관직·장도순 등은 경학사 운영에 필요한 자금 모집을 논의한 결과,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이관직·장도순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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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강습소 설립과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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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조직 후 이회영·이동녕·이관직·이상룡·윤기섭 등은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이라 이름한 것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란 의미의 ‘흥(興)’자를 합친 것이다. 그리고 학교보다 등급이 낮은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추가가 마을의 중국인들이 이들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의심하며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바람에 허름한 빈 집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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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열악한 시설로는 제대로 된 군사훈련과 교육을 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회영은 동삼성(東三省) 총독과 원세개(袁世凱)에게 청원을 한 끝에 토지매입에 대한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합니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공사한 끝에 7월 하순 낙성식을 가졌다. 새 교사는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고, 내무반을 비롯한 사무실·숙직실·편집실·나팔반·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갖추어지는 등 규모를 갖추었다. 합니하로 이전한 후 앞선 추가가 학교는 소학교 교육과정을 가르쳤고, 합니하 학교는 중학교 과정과 따로 군사과를 두어 무관을 양성하였다.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무관학교’라고 부르거나 인식하였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여전히 신흥 강습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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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서농장과 신흥 학우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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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학교 졸업생들은 졸업 후 독립군이 되거나 아니면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동포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가 없던 현실 속에서 졸업생들은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13년 5월 교장 여준(呂準)과 1회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이 신흥 교우단(1915년 4월 신흥 학우단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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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졸업생들이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대열에 투쟁한다는 의지로 조직한 것이었다. 신흥 학우단은 당시 일본이 선포한 ‘경성폭동설’ 및 민족주의자 색출의 일환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후반, 경성에서 폭동사건 발생을 미연에 차단하고 독립군 훈련에 성공한 이들은 점차 군사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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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물과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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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역할 및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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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영**    || 독립군 기지 건설, 경학사 및 신흥무관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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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녕**    || 경학사 내무부장, 독립운동 기지 운영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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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영**    || 재산 헐값으로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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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룡**    || 경학사 사장,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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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기섭**    || 경학사 및 신흥무관학교 교육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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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삼**    || 백서농장 장주, 신흥학교 졸업생 훈련 및 독립군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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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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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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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졸업생들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각지에서 독립투쟁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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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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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에서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을 통해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3·1 운동을 포함한 여러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 그들의 헌신은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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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2024년 11월 23일 (토) 17:32 판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19년 5월 3일, 만주에서 설립된 독립군 양성학교로, 구국의 이념을 고취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군사적 지도자들을 배출한 중요한 기관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로 시작하여 발전하였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이 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여러 사건으로 폐교되기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과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며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칭

  • 신흥강습소
  • 신흥중학교

연원 및 변천

a. 신민회의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

  • 1909년: 신민회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등이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파견된다.
  • 1910년 7월: 남만주 유하현 상원보 추가가에 정착, 그러나 토착민의 배척으로 어려움을 겪음.
  • 1911년 4월: 군사적, 행정적 자립을 목표로 한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상룡을 경학사장으로 추대.
  • 1911-1912년: 대흉년으로 재정난에 빠져 경학사는 사실상 중지된다.

b. 신흥강습소 설립

  • 1911년 6월 10일: 이회영 등은 구국 이념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
  • 소장 이동녕과 김창환, 남상복, 이장녕, 이세영 등이 교관으로 활동하며 운영.
  •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 40여명 배출.

c. 신흥강습소의 발전과 이동

  • 1913년: 삼원보에서 벽지인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
  • 이석영이 자신의 전답 6000석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 본관 건물을 준공.
  • 합니하에서 소학교 교육과정을 제공하며, 중학교와 군사과를 통해 무관을 양성.

d.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의 발전

  • 1913년: 신흥강습소를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어 군사 교육에 집중.
  • 1919년: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이전하여 신흥무관학교로 개교.

e. 신흥무관학교의 난관과 발전

  • 여러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이시영과 이동녕은 학교를 떠나게 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학교를 유지하려 노력.
  • 1919년 5월 3일: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로 이전하여 학교 개교.

f. 신흥무관학교의 폐교

  • 1920년 1월: 중국 당국의 탄압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중국 관헌의 압박으로 학교와 신문사 폐쇄.
  • 1920년 7월: 중일 합동 수색대의 습격과 일제의 가중된 탄압으로 학교는 폐교됨.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역할

a. 설립 당시 교직원 현황

교직원 현황
직위 이름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이장녕
교관 박두희, 성준용, 백종렬, 오상세, 원병상

b. 교육 과정 및 분교 운영

  • 분교 위치
 * 통화현 쾌대모자(快大帽子)
 * 임강현 토애(臨江縣 土崖)
 * 해룡현 성수하자(聖水河子)
 
  • 교육 과정
 * 하사관반: 3개월 과정
 * 특별훈련반: 1개월 과정
 * 장교반: 6개월 과정
 
  • 교육 내용
 *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등으로 나뉘어 육군형법, 편제학, 훈련교범, 측량학, 위수복무, 전략, 전술 등을 교육.

c. 군사 교육과 민족정신 교육

  • 주 교육 내용 : 군사 교육 중심, 일본군과 중국군의 병서를 윤기섭이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사용.
  • 민족정신 교육 : 국어, 국사, 지리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

d. 졸업생들의 활동

  • 만주 지역: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 중국 본토: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

압록강을 건넌 명문가의 후손들

1910년 3월 신민회(新民會) 총감독 양기탁(梁起鐸)은 자신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국외에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각 지역의 담당자를 선임하였는데, 이회영(李會榮)은 서간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은 즉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경비 마련에 착수하였다.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가 망하자, 9월 이회영은 독립군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함께 상인으로 변장한 이회영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를 시찰한 뒤 11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회영은 형제들을 모아 중국 망명을 제의하였고, 형제들은 선뜻 동의하였다. 이회영 일가는 당시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던 명문거족이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길에 모두 동참하였다. 이들 6형제는 망명 자금 마련을 위해 모든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 약 40만 냥, 오늘날 금액으로 약 600억 원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당시 백미 1석이 3원 남짓하던 시절이었다. 이 재산의 대부분은 고종(高宗)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李石榮)이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이 자금은 초기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의 초석을 닦는 토대가 되었다.

1910년 12월 30일,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 일가 50~60여 명은 예닐곱 대의 마차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2월 초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이회영 일가의 망명길을 전후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이동녕과 사촌 이장녕(李章寧) 일가, 장유순·장도순(張道淳)·장한순(張澣淳) 형제 일가, 김창환(金昌煥)·이관직(李觀稙)·윤기섭(尹琦燮)·여준(呂準)·주진수(朱鎭洙) 등이 망명하였고, 안동 일대에서는 이상룡(李相龍)·이준형(李濬衡) 부자와 이상룡의 동생 이봉희(李鳳羲)·이문형(李文衡) 부자 등 일가, 김대락(金大洛)·김형식(金衡植) 부자 일가, 김동삼(金東三) 일가와 문중 청년들, 유인식(柳寅植) 일가, 황호(黃濩)·황만영(黃萬英)·황도영(黃道英) 일가, 이원일(李源一) 일가, 이희영(李羲榮) 형제 일가가 동참하였다. 경북 선산에서는 허위(許蔿)의 처와 가족, 그리고 형 허혁(許赫) 일가, 허형(許衡)·허발(許坺) 부자 일가, 권팔도(權八道) 일가 등 전통 명문가 출신의 100여 가구가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 대열에 합류하였다. 안동 혁신유림들의 망명은 신민회원인 주진수·황만영을 통해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개척 소식을 전해 듣자, 이상룡·김대락·황호 등 세 문중의 원로가 나서며 추진된 것이었다.

경학사-부민단-한족회로 이어지는 민단자치기관

1911년 2월부터 유하현 추가가에 정착한 이들은 4~5월경 추가가 마을 뒤편 대고산(大孤山)에 모여 노천대회(또는 군중대회)를 열었다. 3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다.’는 것과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 등 6형제와 서울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기하고 「경학사 취지서」를 작성·발표하여 경학사를 설립되었다. 경학사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이었다. 이 진용은 1912년 전반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1911~12년 계속된 대흉년으로 재정 조달이 힘들게 되자, 경학사는 1912년 가을부터 사실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회영·이동녕·이관직·장도순 등은 경학사 운영에 필요한 자금 모집을 논의한 결과,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이관직·장도순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신흥강습소 설립과 운영

경학사 조직 후 이회영·이동녕·이관직·이상룡·윤기섭 등은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이라 이름한 것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란 의미의 ‘흥(興)’자를 합친 것이다. 그리고 학교보다 등급이 낮은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추가가 마을의 중국인들이 이들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의심하며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바람에 허름한 빈 집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열악한 시설로는 제대로 된 군사훈련과 교육을 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회영은 동삼성(東三省) 총독과 원세개(袁世凱)에게 청원을 한 끝에 토지매입에 대한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합니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공사한 끝에 7월 하순 낙성식을 가졌다. 새 교사는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고, 내무반을 비롯한 사무실·숙직실·편집실·나팔반·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갖추어지는 등 규모를 갖추었다. 합니하로 이전한 후 앞선 추가가 학교는 소학교 교육과정을 가르쳤고, 합니하 학교는 중학교 과정과 따로 군사과를 두어 무관을 양성하였다.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무관학교’라고 부르거나 인식하였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여전히 신흥 강습소였다.

백서농장과 신흥 학우단

신흥 학교 졸업생들은 졸업 후 독립군이 되거나 아니면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동포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가 없던 현실 속에서 졸업생들은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13년 5월 교장 여준(呂準)과 1회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이 신흥 교우단(1915년 4월 신흥 학우단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졸업생들이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대열에 투쟁한다는 의지로 조직한 것이었다. 신흥 학우단은 당시 일본이 선포한 ‘경성폭동설’ 및 민족주의자 색출의 일환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후반, 경성에서 폭동사건 발생을 미연에 차단하고 독립군 훈련에 성공한 이들은 점차 군사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주요 인물과 활동

인물 역할 및 기여
**이회영** 독립군 기지 건설, 경학사 및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동녕** 경학사 내무부장, 독립운동 기지 운영에 기여
**이석영** 재산 헐값으로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
**이상룡** 경학사 사장,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에 기여
**윤기섭** 경학사 및 신흥무관학교 교육 담당
**김동삼** 백서농장 장주, 신흥학교 졸업생 훈련 및 독립군 기여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독립운동

신흥무관학교는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졸업생들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각지에서 독립투쟁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결론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에서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을 통해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3·1 운동을 포함한 여러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 그들의 헌신은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한다.


참고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검색일: 2024년 11월 17일).
  • 국사편천위원회, "신흥무관학교[신흥 강습소]", 우리역사넷, http://www.history.go.kr (검색일: 2024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