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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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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은 1897년 경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명칭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으며, 건물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Sabatin)맡았다. 이후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중명전(重眀殿)’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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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경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을 당시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수옥헌은 1901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현재의 2층 벽돌 건물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맡아 재건된 것이다.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이곳이 고종의 집무실(편전)이자 외국 사절 접견실로 사용되면서 '중명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명(重眀)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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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중명전에서 체결되었고 고종은 그 부당함을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뒤 퇴위당했다.1906년에는 황태자 순종과 윤비가 중명전에서 가례를 올려 외국 사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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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피탈 이후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는 건물이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60년대까지 외국인들의 사교장 '경성구락부'로 이용되었다. 1925년 화재로 크게 훼손되어 외벽만 남은 것을 복구하였으므로 원형과는 다소 달라져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 부부가 1963년부터 거주한 바 있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이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던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중명(重眀)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 경운궁 안 평성문 밖에 있었는데 1906년에 순종과 윤비가 가례를 올릴 때 외국사신들을 이곳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며 을사조약이 이곳에서 강제로 이루어졌다.
 
 
국권 피탈 이후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는 건물이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경성구락부가 되어 60년대까지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25년 화재로 크게 훼손되어 외벽만 남은 것을 복구하였으므로 원형과는 다소 달라져 있다.
 
최근까지 영친왕 비인 이방자 명의, 지금은 개인소유
 
 
   
 
   
 
=='''건축'''==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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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4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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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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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2일 (토) 14:32 판


개요

덕수궁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다.

연혁

연도 내용
1897 황실도서관[1]으로 건립
1901 창건
1904 덕수궁화재
1905 을사늑약 체결
1906 황태자[2] 가례
1915 외국인에게 임대
1925 화재
2007 덕수궁 편입

특징

1897년 경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을 당시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수옥헌은 1901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현재의 2층 벽돌 건물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맡아 재건된 것이다.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이곳이 고종의 집무실(편전)이자 외국 사절 접견실로 사용되면서 '중명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명(重眀)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명전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중명전에서 체결되었고 고종은 그 부당함을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뒤 퇴위당했다.1906년에는 황태자 순종과 윤비가 중명전에서 가례를 올려 외국 사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국권 피탈 이후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는 건물이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60년대까지 외국인들의 사교장 '경성구락부'로 이용되었다. 1925년 화재로 크게 훼손되어 외벽만 남은 것을 복구하였으므로 원형과는 다소 달라져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 부부가 1963년부터 거주한 바 있다.


건축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지하1층, 지상 2층의 단순한 2층 벽돌 건물이지만 1층의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가 꾸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앞면 가운데 현관을 두었고 사모지붕의 앞뒷면 가운데에는 지붕창을 두었다.
1층과 2층 벽면 사이에는 장식벽돌을 쌓았으며 현관 내부에 모자이크 바닥이 있다.

참고문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48
https://www.ohseoul.org/post/%EC%A4%91%EB%AA%85%EC%A0%84/tag/9854
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8UrEsrNaW78JcvX1NxhtcFtVSR1uT6ehv0sDwJvDQanp4AgAJld2FsK7PMu2an1D.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99379&sectionId=b_sec_1&pageIndex=53&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4%91%EB%AA%85%EC%A0%84(%E9%87%8D%E6%98%8E%E6%AE%BF)

각주

  1.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다.
  2.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