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악극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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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케↗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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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짬]]

2024년 6월 10일 (월) 09:43 판

전쟁에서 벗어나
















이처럼 다양한 음악양식과 정서를 담고 있었던 대중가요는 1930년대 말부터 전쟁과 불황으로 음반 산업이 난항을 겪게 되면서, 음반 제작을 넘어 공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선두주자는 오케레코드사 전속인 ‘조선악극단’이었다. 악극은 1920년대에 신파극의 흥행을 위해 삽입한 막간극과 일본의 소녀가극단에서 영향을 받은 ‘배구자악극단’활동을 통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들 악극단이 1930년대에 큰 인기를 얻는 것에 주목한 음반사들은 자회사에서 발매한 음반을 홍보하기 위한 공연에서 규모를 확대하여 본격적인 공연산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당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악극단은 악극, 춤, 노래, 만담이 모두 포함된 버라이어티쇼 형태의 악극을 선보였다. 또한, 당대의 대중가요가 그랬던 것처럼 악극단의 공연 역시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지의 다양한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형태였다.

검열에서 속에서도

검열 등으로 인해서 음반계의 상황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지배원리 아래에 놓여있던 음반 회사들은 이윤 창출을 위해 인기곡 양산에 주력하였다. 그를 위해 각 음반 회사들은 대중의 선호와 기호를 살피는데 부심하였고 저가 정책 등의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였다. 이에 힘입어 음반 회사들은 그 규모를 넓혀갔다. 대중가요 음반 발매 수만 보더라도 1933년에 약 300여 곡이었던 것이 1936년에는 거의 두 배로 증가하여 600곡에 가까웠으니, 당시 음반 산업이 얼마나 활발하게 전개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대중음악은 정치적 검열과 한계 속에서도 다양한 장르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전개과정에는 물론 정치적인 맥락이 크게 개입되었지만, 동시에 당대 대중들의 취향도 매우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현대의 대중음악계만큼이나 다양한 지역의 음악어법이 사용되었고, 다양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었다.한국 근대의 대중음악을 재조명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일제강점기 대중음악이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표정들이 함께 재발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