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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진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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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진짜 시작==
 
==대중가요의 진짜 시작==
1926년에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아리랑>과, 앞서 언급한 <낙화유수>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대중음악의 기원은 영화 주제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애초에 대중가요를 지향하여 창작된 노래에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순수하게 대중가요를 겨냥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해서 노래까지 한 대중가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 부르자>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음악계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노래는 1932년에 발매된 <황성의 적>이다. <황성옛터>라는 제목이 더 익숙한 <황성의 적>은 발매 전부터 극장의 막간 무대에서 불리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은 당시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적으로 열악했던 대중음악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작사자와 작곡자, 그리고 가수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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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아리랑>과, 앞서 언급한 <낙화유수>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대중음악의 기원은 영화 주제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애초에 대중가요를 지향하여 창작된 노래에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순수하게 대중가요를 겨냥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해서 노래까지 한 대중가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 부르자>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음악계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노래는 1932년에 발매된 <황성의 적>이다. <황성옛터>라는 제목이 더 익숙한 <황성의 적>은 발매 전부터 극장의 막간 무대에서 불리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은 당시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적으로 열악했던 대중음악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작사자와 작곡자, 그리고 가수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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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장르의 탄생==
 
==다양한 장르의 탄생==

2024년 6월 5일 (수) 09:15 판

대중가요의 진짜 시작

1926년에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아리랑>과, 앞서 언급한 <낙화유수>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대중음악의 기원은 영화 주제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애초에 대중가요를 지향하여 창작된 노래에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순수하게 대중가요를 겨냥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해서 노래까지 한 대중가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 부르자>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음악계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노래는 1932년에 발매된 <황성의 적>이다. <황성옛터>라는 제목이 더 익숙한 <황성의 적>은 발매 전부터 극장의 막간 무대에서 불리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은 당시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적으로 열악했던 대중음악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작사자와 작곡자, 그리고 가수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2468054254E6D0012C.jpg <황성의 적 레코드 :1932

다양한 장르의 탄생

유행가

1930년대 초반은 대중가요의 몇 가지 갈래가 정착된 시기이기도 하다. 과거와 비교할 때 그 모습이 상당히 달라지기는 하였으나 오늘날까지 향유되고 있는 ‘트로트’라는 갈래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이때는 트로트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고 ‘유행가’라는 장르 속에 트로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트로트는 주로 2박자에 4음과 7음이 빠진 단음계를 특징으로 하였다. 그 전형적인 예가 <목포의 눈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목포의 눈물>은 민족적인 내용의 가사로 인해 당대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까지 민족의 노래라 일컫는다

신민요

다음으로 ‘새로운 민요’라는 뜻의 신민요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노래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대중가요 갈래이기에 자생적인 대중가요로 볼 수 있다. 신민요의 첫 모습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장한 <아리랑>에서 그 일단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신민요’라는 갈래명을 달고 등장한 음반의 수록곡은 1931년에 발매된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와 <녹슨 가락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신민요는 모든 절이 가사로 이루어진 트로트와 달리 민요의 후렴구를 종종 차용하여 트로트와 차별된다.

재즈송

다음으로 ‘재즈송’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재즈송은 본격적인 의미의 재즈뿐만 아니라 팝송과 샹송, 그리고 라틴 음악 등의 서양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즉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일련의 노래를 재즈송이라는 범주에서 다룰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의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중심으로 재즈 열풍이 일어났고, 1928년에 이미 ‘코리안 재즈 밴드’가 순회공연을 하여 당대인의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재즈송이라는 갈래명을 달고 일련의 노래가 등장한다. 이 중에서 복혜숙이 불러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발매된 <종로행진곡>은 재즈송이라는 갈래명을 달고 등장한 가장 이른 시기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만요

마지막으로 일종의 코믹 송(comic song)에 해당하는 ‘만요(漫謠)’는 당시에 유행하던 희극 갈래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등장한 대중음악 갈래다. 음악적으로는 서양 대중음악, 일본 대중음악, 전통가요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는데, 어떤 경우든지 웃음을 지향하는 가사로 이루어진 것만은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요라는 갈래명이 음반에 등장한 가장 이른 시기의 예로는 1933년에 콜럼비아에서 발매된 <어린 신랑>과 <깡깡박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만요라는 곡종명을 부기하지 않았을지라도 1930년에 발매된 <붕까라>와 같은 노래는 풍자적인 가사로 인해 만요로 간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