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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재즈밴드, 재즈가 낳은 작은 불씨-''===
 
===''-코리아재즈밴드, 재즈가 낳은 작은 불씨-''===
1920년대 음악을 이야기 1926년 홍난파가 조직한 '코리아재즈밴드'를 꼽을 수 있습니다. 1925년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 백명곤이 상하이에서 재즈 악보와 악기를 구입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 최초의 8인조 재즈 밴드가 탄생했다. 제1색소폰에 백명곤, 제2색소폰에 이철, 트럼펫 한욱동, 피아노 홍난파, 바이올린과 밴조 홍재유, 드럼 이상준, 슬라이드 트롬본 박건운, 노래는 이인선. 1926년 YMCA에서 열린 제1회 연주회는 대성황을 이뤘다고합니다. 세련된 음색에 젊은이들은 매료됐고, 전국을 순회하는 공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929년 9월호 개벽 잡지에는 “코리아재즈밴드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젊은 피에 끓는 남녀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고 언론에는 “미국 재즈밴드의 패왕, 폴 화이트먼”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재즈 열풍을 우려하는 “서울맛 서울정조-경성의 재즈”라는 논설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즉 이 시기 경성의 청년 대중들은 한국의 대중가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서양 대중음악의 어법에 친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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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음악을 이야기 1926년 홍난파가 조직한 '코리아재즈밴드'를 꼽을 수 있다. 1925년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 백명곤이 상하이에서 재즈 악보와 악기를 구입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한국 최초의 8인조 재즈 밴드가 탄생했다. 제1색소폰에 백명곤, 제2색소폰에 이철, 트럼펫 한욱동, 피아노 홍난파, 바이올린과 밴조 홍재유, 드럼 이상준, 슬라이드 트롬본 박건운, 노래는 이인선. 1926년 YMCA에서 열린 제1회 연주회는 대성황을 이뤘다고한다. 세련된 음색에 젊은이들은 매료됐고, 전국을 순회하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29년 9월호 개벽 잡지에는 “코리아재즈밴드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젊은 피에 끓는 남녀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고 언론에는 “미국 재즈밴드의 패왕, 폴 화이트먼”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재즈 열풍을 우려하는 “서울맛 서울정조-경성의 재즈”라는 논설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즉 이 시기 경성의 청년 대중들은 한국의 대중가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서양 대중음악의 어법에 친숙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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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악단인 ‘코리아재즈밴드’. 2년여간 전국을 누비며 순회공연을 펼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에게 재즈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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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악단인 ‘코리아재즈밴드’. 2년여간 전국을 누비며 순회공연을 펼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에게 재즈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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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의 3박자에 다장조로 되어 있다. 왈츠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32마디로 되어 있고, 전주가 있다. 도·레·미·솔·라의 5음계적 기법을 채용하였다. 전문적인 기교가 없는 소박한 멋을 풍기고 있다.
 
4분의 3박자에 다장조로 되어 있다. 왈츠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32마디로 되어 있고, 전주가 있다. 도·레·미·솔·라의 5음계적 기법을 채용하였다. 전문적인 기교가 없는 소박한 멋을 풍기고 있다.
  
일본식의 유행가나 외국의 가요를 번안해 부르던 당시 우리나라 창작 대중가요 제1호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시 서민들의 감정을 드러낸 곡으로 극영화와 더불어 인기 절정이었고, 장안의 기방(妓房)에서 많이 불리었을 뿐 아니라 젊은층의 학생들도 많이 불렀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중가요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가라서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보기에는 미흡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영화 주제가곡이 아닌 순수 창작 대중가요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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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의 유행가나 외국의 가요를 번안해 부르던 당시 우리나라 창작 대중가요 제1호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시 서민들의 감정을 드러낸 곡으로 극영화와 더불어 인기 절정이었고, 장안의 기방(妓房)에서 많이 불리었을 뿐 아니라 젊은층의 학생들도 많이 불렀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중가요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가라서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보기에는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영화 주제가곡이 아닌 순수 창작 대중가요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2024년 6월 5일 (수) 08:50 판

-코리아재즈밴드, 재즈가 낳은 작은 불씨-

1920년대 음악을 이야기 1926년 홍난파가 조직한 '코리아재즈밴드'를 꼽을 수 있다. 1925년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 백명곤이 상하이에서 재즈 악보와 악기를 구입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한국 최초의 8인조 재즈 밴드가 탄생했다. 제1색소폰에 백명곤, 제2색소폰에 이철, 트럼펫 한욱동, 피아노 홍난파, 바이올린과 밴조 홍재유, 드럼 이상준, 슬라이드 트롬본 박건운, 노래는 이인선. 1926년 YMCA에서 열린 제1회 연주회는 대성황을 이뤘다고한다. 세련된 음색에 젊은이들은 매료됐고, 전국을 순회하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29년 9월호 개벽 잡지에는 “코리아재즈밴드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젊은 피에 끓는 남녀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고 언론에는 “미국 재즈밴드의 패왕, 폴 화이트먼”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재즈 열풍을 우려하는 “서울맛 서울정조-경성의 재즈”라는 논설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즉 이 시기 경성의 청년 대중들은 한국의 대중가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서양 대중음악의 어법에 친숙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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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악단인 ‘코리아재즈밴드’. 2년여간 전국을 누비며 순회공연을 펼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에게 재즈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낙화유수, 최초의 창작 가요-

1928년 이후에 발매된 노래 중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낙화유수>입니다. <강남달>이란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낙화유수>는 1927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이기도 합니다. 당시 변사로 활동하던 김영환(김서정)이 작사와 작곡을 맡고 동요 가수 이정숙이 부른 <낙화유수>는 1929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영화와 더불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노래는 최초의 창작 가요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1929년에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이정숙의 노래로 음반이 발매되었다. 노랫말은 모두 3절로 되어 있고, 1절은 다음과 같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의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울까.

4분의 3박자에 다장조로 되어 있다. 왈츠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32마디로 되어 있고, 전주가 있다. 도·레·미·솔·라의 5음계적 기법을 채용하였다. 전문적인 기교가 없는 소박한 멋을 풍기고 있다.

일본식의 유행가나 외국의 가요를 번안해 부르던 당시 우리나라 창작 대중가요 제1호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시 서민들의 감정을 드러낸 곡으로 극영화와 더불어 인기 절정이었고, 장안의 기방(妓房)에서 많이 불리었을 뿐 아니라 젊은층의 학생들도 많이 불렀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중가요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가라서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보기에는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영화 주제가곡이 아닌 순수 창작 대중가요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