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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양국의 쟁탈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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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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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일본에서는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산업화와 군대의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은 징병제를 도입하여 군사를 육성하고, 육군 장비와 훈련에는 독일제도를, 해군장비와 훈련에는 영국제도를 채택하여 강력한 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화와 군 현대화를 통해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품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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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년부터 1895년에 일어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610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해,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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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간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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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br> | ||
+ | -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사실상 점령해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등 일본을 견제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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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전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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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 대해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시아 개전 및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2월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는 한편 중국 뤼순(旅順)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러시아 함대와 격돌하였으며, 10일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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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행 및 경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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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4.07.13 | ||
+ | 1. 종로 백목전에 모인 10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송수만은 황무지를 일본에게 차여(借與)함은 불가하며 황무지 차여에 중개 역할을 한 국내 인사들을 성토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br> | ||
+ | 2. 대한 제국 경위원(警衛院)과 경무청에서 '''경찰관을 파견'''하고, 일본 헌병사령부에서는 '''헌병을 파견'''하여 '''집회를 감시하고 참석자들을 해산시켰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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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4.7.14 | ||
+ | - 100여 명이 백목전에 모여, 일본의 요구를 철폐시킬 때까지 매일 집회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송수만, 심상진 등은 전국에 '''통문을 발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들의 집에 '''공함(公函)을 보내어''', 보안회 임시회의소에서 회동할 것을 요구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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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4.07.16 | ||
+ | - 집회에서는 회장에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에 송인섭(宋寅燮)을 천거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대변회장(代辯會長)에 송수만을 선출했다. 이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갔다'''. 대한 제국 외부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간 것에 대해 항의하고,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 관아로 인도할 것을 요청'''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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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4.07.17 | ||
+ | - 고종은 경무청에 칙령을 내려 '''보안회의 집회를 금지&해산하게 했다'''. 이에 보안회는 7월 17일부터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로 '''회의 개최 장소를 이전'''하고 일본공사관에 구속된 송수만 대신 원세성을 대변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송수만·송인섭 등의 '''체포에 대해 격렬히 성토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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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4.07.20~21 | ||
+ | -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 대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들은 일본의 '''대한 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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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4.07.22 | ||
+ | - 한어학교의 [[시민 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br> | ||
+ | -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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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황무지 점탈 계획이 저지당한 뒤, 일본군은 '''회장 원세성과 회원 신형균·이범석 등을 다시 체포'''하는 등 보안회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8월 1일 저녁 서울 시내 중요한 거리에 '''일본군 병참사령부 표목을 박았다'''. 이는 서울이 일본군 지배하에 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군이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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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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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 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9윌 11일에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의 활동은 '''일제의 견제를 받아 점차 위축'''되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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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 의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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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671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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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br>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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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안회가 대한 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고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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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 | *『러일전 쟁전후일본의 한국침략』(역사학회, 일조각, 1986) | ||
+ | *『日露戰爭史の 硏究』(信夫淸三郞·中山治一, 河出書房新社, 1972) | ||
+ | *『日本外交史硏究』-日淸·日露戰爭-(日本國際政治學會, 1962)</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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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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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애국계몽운동]] | ||
+ | [[분류:오연수]] |
2023년 12월 11일 (월) 14:31 판
목차
러일전쟁 (露ㆍ日戰爭)
정의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양국의 쟁탈전이다.
발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일본에서는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산업화와 군대의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은 징병제를 도입하여 군사를 육성하고, 육군 장비와 훈련에는 독일제도를, 해군장비와 훈련에는 영국제도를 채택하여 강력한 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화와 군 현대화를 통해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품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1894년부터 1895년에 일어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610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해,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삼국간섭
-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
-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사실상 점령해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등 일본을 견제하게 된다.
선전포고
- 이에 대해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시아 개전 및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2월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는 한편 중국 뤼순(旅順)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러시아 함대와 격돌하였으며, 10일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진행 및 경과
- 1904.07.13
1. 종로 백목전에 모인 10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송수만은 황무지를 일본에게 차여(借與)함은 불가하며 황무지 차여에 중개 역할을 한 국내 인사들을 성토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2. 대한 제국 경위원(警衛院)과 경무청에서 경찰관을 파견하고, 일본 헌병사령부에서는 헌병을 파견하여 집회를 감시하고 참석자들을 해산시켰다.
- 1904.7.14
- 100여 명이 백목전에 모여, 일본의 요구를 철폐시킬 때까지 매일 집회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송수만, 심상진 등은 전국에 통문을 발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들의 집에 공함(公函)을 보내어, 보안회 임시회의소에서 회동할 것을 요구했다.
- 1904.07.16
- 집회에서는 회장에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에 송인섭(宋寅燮)을 천거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대변회장(代辯會長)에 송수만을 선출했다. 이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갔다. 대한 제국 외부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간 것에 대해 항의하고,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 관아로 인도할 것을 요청했다.
- 1904.07.17
- 고종은 경무청에 칙령을 내려 보안회의 집회를 금지&해산하게 했다. 이에 보안회는 7월 17일부터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로 회의 개최 장소를 이전하고 일본공사관에 구속된 송수만 대신 원세성을 대변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송수만·송인섭 등의 체포에 대해 격렬히 성토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 1904.07.20~21
-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 대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들은 일본의 대한 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 1904.07.22
- 한어학교의 시민 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
-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
결
일본의 황무지 점탈 계획이 저지당한 뒤, 일본군은 회장 원세성과 회원 신형균·이범석 등을 다시 체포하는 등 보안회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8월 1일 저녁 서울 시내 중요한 거리에 일본군 병참사령부 표목을 박았다. 이는 서울이 일본군 지배하에 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군이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
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
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 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9윌 11일에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의 활동은 일제의 견제를 받아 점차 위축되었다.
역사적 의의
- 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 창립 이후 단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
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 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 보안회가 대한 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고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러일전 쟁전후일본의 한국침략』(역사학회, 일조각, 1986)
- 『日露戰爭史の 硏究』(信夫淸三郞·中山治一, 河出書房新社, 1972)
- 『日本外交史硏究』-日淸·日露戰爭-(日本國際政治學會,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