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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월) 00:13 기준 최신판
사찰 정보
창건시기 및 위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초 태조 왕건이 설립하였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장소에 세운 절로, 통일왕조를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의의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장소에서 세운 절로써,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비로소 새로운 삼국을 통일한 통일왕조 고려의 시작을 알렸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건축물
관련된 역사적 사실
-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고려 건국 초, 고려와 백제는 서로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제의 견훤은 태조 즉위 두 달 후 즉위를 축하하는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전쟁 중 고려가 신라를 지원하게 되며 백제와 고구려가 등을 돌리게 된다. 이후 고려는 고창전투에서 후백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신검에 의해 쫓겨난 후백제의 견훤이 항복하였다. 신검 또한 936년 고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며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1]
-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민왕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신하기 위해 태조영전이 있는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어 천도에 관한 점을 치게 하였다. 결국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고 한다.
여담
보통 신검의 항복을 받아낸 장소라 이곳에 개태사를 지었다는 설이 많으나, 견훤이 머무르다 죽은 곳이기에 왕건이 이 곳에 개태사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견훤이 신검보다 그들의 정신적인 실제 왕이었다. 후백제의 백성들이 후백제 왕이 죽은 곳이라 하여 참배하게 되면 잔존 세력이 모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며 이는 반역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통일 초기인 고려에게 있어서 큰 위험요소 였으며, 따라서 왕건은 고려식 사찰을 이 곳에 설립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