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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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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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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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363]
영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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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856]
영은사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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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05]
안동봉정사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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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964]
통영안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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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암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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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2023년 12월 10일 (일) 22:03 판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정의 및 설명

괘불(掛佛)이란 야외에서 개최되는 불교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대형 불화를 의미한다. 괘불화(掛佛畵) 또는 천이나 종이 그려 부처, 보살 등을 벽에 거는 탱화(幀畵)의 일종이므로 괘불탱(掛佛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괘불(掛佛)'이라는 명칭은 '불화를 건다'라는 의미의 '掛(걸 괘)-佛畵(불화)'에서 유래되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불화는 사찰의 전각 내부에 봉안하는데, 괘불의 경우 전각 외부에 설치되기 때문에 그 크기가 매우 크다. 주로 야외에서 개최되는 의식은 사찰의 주전각 앞 중정(中庭)에서 진행되었고, 괘불화는 그에 맞게 대부분 세로 10m가 넘는 대형 화폭으로 조성되었다.


괘불은 평소에는 함에 넣어 전각 안에 보관되고, 의식이 있는 날 아침에 중정으로 옮겨와 사용되었다. 법당에서 불화를 옮겨 와 펼치는 절차를 괘불이운(掛佛移運)이라고 한다. 이때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암송하는 진언(眞言)과 게송(偈頌)은 석가모니불이 부처의 설법을 듣고 영취산으로부터 내려와 법을 설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

나주 죽림사 세존괘불탱

한국에서 괘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대규모 천도 의식(薦度儀式)[1]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필요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야외 의식을 위해 전용 탱화가 필요했던 조선 후기 불교신앙의 특징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괘불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적되는 것은 1622년 조성된 사진으로 제시된 죽림사 세존괘불탱이다. 현재 연구를 통해 17세기~20세기에 걸친 괘불 100여 점이 조사된 상태이다.



내용

영산괘불

괘불화는 영산회(靈山會)라는 천도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영산회 또는 영산회상이란 좁은 의미로는 영축상(靈鷲山)에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法華經)을 설한 인도 기사굴산에서의 법회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석가가 말씀을 전하는 것, 또는 불교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며 불교의 상징적인 표상으로서 뜻을 지닌다.


조선시대의 경우 영산회는 여러 종류의 재를 행하기 전 앞 순서에 행하는 재전작법(齋前作法)이었다. 의식의 목적이 살아있는 존재와 세상을 떠난 자의 화해이든, 오랜 가뭄 끝에 비를 비는 기우재(祈雨齋)이든, 죽어서 갚아야 할 생전의 업을 미리 갚는 예수재(豫修齋)이든 본격적인 의식은 영산작법으로 불보살에게 권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괘불 역시 조성 당시 쓰인 화기에 '영산괘불' 또는 '영산회괘불'로 기입된 예시가 매우 많다. 영산괘불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의식용 불화이기도 하며, 동시에 영산회 의식에 걸리는 괘불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 영산탱화의 도상

영산탱화의 경우 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이 도상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 석가모니불을 협시보살,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10대제자, 사천왕, 팔부신중, 천중 등의 다양한 권속들이 둘러 싸고 있는 군도 형식을 보인다.



삼척 영은사 괘불의 경우 위의 도상에서 연화대좌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석가모니좌상이 광배가 함께 그려져 있다. 여의를 든 문수보살과 연꽃을 든 보현보살, 보관(寶冠)에 화불(化佛)을 모신 관세음보살, 합장한 범천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사천왕은 하단에 위치해 있는데, 비파를 연주하는 다문천왕(多聞天王), 칼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增長天王), 탑과 당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상이 바로 '군도' 형식의 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상주 북장사 영산회괘불탱은 정면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10대제자,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4구의 금강이 둘러싼 군도식 배치의 괘불이다. 이 작품은 이 지역에서 유행한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입상형식으로 변화시킨 군도식 영산회상도의 초기 작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문경 김룡사 영산회괘불도, 안동 봉정사 영산회괘불도 역시 북장사 괘불의 도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문경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는 1703년 수원, 탄주, 혜찰, 인혜, 민행, 극륜 등이 제작한 불화이다. 본존인 석가모니는 두광과 신광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에 나타난 수인은 좌상에서 표현하던 석가모니의 항마촉지인을 입상에 적용시켜 그린 것으로 파악된다. 석가모니불 좌우의 권속들은 크기가 매우 작게 표현되었는데, 아래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연꽃을 들고 위치해 있으며 그 위로 6대보살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는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가 석가모니불을 향해 합장하고 있으며, 그림의 좌우 가장자리는 사천왕과 팔금강, 범천과 제석천, 용왕과 용녀가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많은 인물들을 나타내고 있는 불화인데, 불격(佛格)에 따라 크기에 차이를 두어 권속 간의 위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17세기 경상도 지역의 괘불 도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구도와 세련된 기법, 색감 등은 이후 봉정사 괘불도로 이어진다고 해석된다.


안동 봉정사 영산회괘불도는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10대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도상의 괘불이다. 맨 아래에는 연꽃을 든 보살 3존과 여의(如意)를 든 보살이 나란히 서 있으며, 이 가운데 여의를 든 보살은 문수보살이며 그 맞은편에 분홍색의 연꽃을 든 보살은 보현보살로 추정된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위로는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과 보관에 정병이 있고 보협인을 든 대세지보살이 서있다. 이 괘불은 1710년에 제작된 것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교하면 사천왕, 호법신 등이 생략되어 도상이 간략해지는 그 과도기에 있는 작품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통영 안정사 영산회 괘불도를 예로 들어 살펴 보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석가삼존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입상이 괘불을 가득채우고 있으며 본존인 석가모니불의 중심으로 다보불, 아미타불, 가섭존자, 아난존자를 남는 공간에 그려 완성했다. 이 괘불은 17세기 군도식 영산괘불에서 훨씬 더 간략화된 도상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도상은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의 저명한 화원이었던 의겸에 의해 조성된 양상을 띤다.


사자암 영산회괘불도의 경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아미타불은 설법인을 하고 있다. 이 설법인은 좌우대칭으로 그림의 균형을 더한다. 푸른 사자를 타고 있는 것은 문수동자이고,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것은 보현동자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의 대표적인 협시보살이다. 이 괘불의 도상은 당시 경기지역에서 유행했던 도상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천도의식

괘불화가 헌괘된 의식으로는 49재, 예수재, 수륙재(水陸齋)[2]와 같은 천도 의식이 대표적이다.

의식에 따라 다른 도상의 괘불화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괘불 한 점을 조성하는 데 많은 인원이 필요했고, 한 점의 괘불을 계속 보수하여 사용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식의 목적에 맞춰 여러 도상의 괘불을 갖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떄문에 다양한 의식에 사용할 수 있는 주존 석가모니불이 괘불의 본존으로 가장 선호되었다.


그 외

17세기에는 영산회를 비롯해 삼신불, 장엄신, 오불회 등 괘불화의 전 도상이 다 등장한다. 그러나 영취산의 석가모니불에 기초한 영산회괘불의 도상이 구심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웹사이트 [1] [2] [3] [4] [5] [6] [7] [8] [9] [10] [11]

주석

  1. 죽은 이의 영혼을 좋은 세계로 보내고자 행하는 종교의례. 불교의식.
  2.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