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사찰 소개==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서쪽 중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
 
2번째 줄: 2번째 줄: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서쪽 중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지난 1995년 [[석굴암]], 서울의 종묘,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f>https://www.gyeongju.go.kr/tour/page.do?mnu_uid=2695&con_uid=246&cmd=2</ref>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서쪽 중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지난 1995년 [[석굴암]], 서울의 종묘,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f>https://www.gyeongju.go.kr/tour/page.do?mnu_uid=2695&con_uid=246&cmd=2</ref>
  
751년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설에도,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역시 김대성에 의해서 였다.  
+
751년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설에도,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역시 김대성에 의해서 였다.  
  
1593년 5월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E%84%EC%A7%84%EC%99%9C%EB%9E%80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 · 극락전 · 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ccbaKdcd=13&ccbaAsno=05020000&ccbaCtcd=37&ccbaCpno=1333705020000&ccbaGcode=CA&ccbaBcode=06&ccbaMcode=01&culPageNo=47&header=div&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DivList.do&pageNo=1_1_3_0</ref>
+
1593년 5월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E%84%EC%A7%84%EC%99%9C%EB%9E%80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ccbaKdcd=13&ccbaAsno=05020000&ccbaCtcd=37&ccbaCpno=1333705020000&ccbaGcode=CA&ccbaBcode=06&ccbaMcode=01&culPageNo=47&header=div&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DivList.do&pageNo=1_1_3_0</ref>
  
 
==소속 문화재==
 
==소속 문화재==

2023년 12월 7일 (목) 17:40 판

사찰 소개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서쪽 중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지난 1995년 석굴암, 서울의 종묘,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1]

751년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설에도,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역시 김대성에 의해서 였다.

1593년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2]

소속 문화재

불국사 3층 석탑다보탑 (국보)

석굴암 (국보)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국보)

불국사 대웅전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외 다수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