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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현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과 모친 홍종식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다 보니 부모님과 윗형제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안동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1923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현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과 모친 홍종식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다 보니 부모님과 윗형제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안동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파일:대학생김준엽.pngl200pxlcenterl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유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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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5일 (화) 06:26 판

목차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교육자. 본관은 충주(忠州).

초년기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중국사와 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고려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이자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정보

  • 출생: 1923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 (現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
  • 사망:2011년 6월 7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안암병
  • 본관:충주 김씨
  • 학력: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 / 중퇴)
    국립중앙대학 문학원 (사학 / 석사 중퇴)
    국립타이완대학 문학원 (사학 / 석사 수료)
  • 직업:독립운동가, 교육
  • 종교:무교
  • 가족:아내 민영주, 외동아들 김홍규
  • 묘소: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97호
  • 훈장:건국훈장 애국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추서
    중국어언문화우의장

생애

1.일제강점기

1923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현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과 모친 홍종식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다 보니 부모님과 윗형제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안동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파일:대학생김준엽.pngl200pxlcenterl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유학시절 대학생김준엽.png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 재학도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일본군으로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배치된 뒤 단독으로 탈영, 같은 조선인 출신 학병 장준하와 합류하여 수천 리를 걸어(장정, 長征)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때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달 전.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장준하 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임정근 등과 함께 강원도반에 편성되어 강원도반 반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파일:광복군김준엽.pngl200pxlcenterl광복군 시절의 모습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거의 없다고 폄하 하지만,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항일독립운동단체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일본군에 걸리면 무조건 처형이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군에 잡혀도 일본 간첩으로 오인되면 죽은 목숨이다. 뭐 다행히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덕에 오해 없이 잘 끝났지만. 이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 징집 전 나침반을 마련하여 갈 정도로 광복군에 합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가 탈출한 츠카다 부대는 조선인 탈영병이 나오지 않은 아주 혹독한 부대였는데, 김준엽은 그 부대에서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 병사였다. 김준엽은 훗날 그의 회고록 "장정"에서 일본군 시절 작은 실수로 인해 상관으로부터 뺨을 맞은 후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기술했다. 김준엽은 이 때가 태어나서 뺨을 처음으로 맞은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아마 일본군의 강제징용된 한국인 병사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가혹행위의 경험이 김준엽으로 하여금 츠카다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광복군 시절 이범석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이범석의 비서였던 민영주 여사와 만나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는 이범석이 맡았다. 민영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명문인데, 아버지 민필호는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이다. 또한 민영주의 오빠 민영수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김준엽은 이런 처가의 이력을 긍지로 여겼다.

2.광복이후

해방 후에는 임정 요인들과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난징의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22]에서 한국어 강사로 근무하면서 중앙대학[23] 대학원에서도 중국사 공부를 하다가,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1949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24] 1951년 잠시 국립타이완대학에 유학했다가[25] 1955년 완전히 귀국한다. 이후 후학 양성에 힘써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웠다. 이듬해 아세아문제연구소 내에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는데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적 연구기관으로 그는 공산주의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연구한 이유는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그의 노력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공산권 연구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26][27]

또한 중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28][29]으로 꼽힐 정도였다. 고려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30] 중국에서도 한중 관계에 대한 김준엽의 공로를 인정해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훈장을 준 최초의 사례였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5.16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31]의 고문 자격으로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방문하여 자와할랄 네루를 만나기도 했다. 1955년 대만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정계 진출 요청이나 장관 제의를 여러번 받았으나, 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집중하겠다며 모두 고사한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1972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때 북한에서 만난 김중린 당비서가 낯이 익어서 고향을 묻다가 신의주고보 1년 후배임을 알게 되어 회후하였다.

3.고려대총장 시절

파일:총장김준엽.pngl200pxlcenterl취임식에서 연설하는 김준엽 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여러가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맞서다 결국 1985년 졸업식과 함께 강제로 퇴임하게 된다. 총장이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 CBS 기사 참조. 1)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양반이다.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32]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인데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준엽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당시 대학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교수 등 교직원 자녀의 특례 입학을 문제로 삼으면서 '특례로 입학한 학생들을 제적시키든지, 아니면 총장을 그만두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김준엽은 자신이 총장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준엽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쫓겨나고 고려대에서는 총장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졸업식 당일날은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이 학내에 진주해서 기기묘묘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5년 신학기가 개강하자마자 총장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계속됐는데, 기숙사 수위의 강아지까지 따라 나섰다고 전해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게 쫓기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밀리는 정도였다고(...). 훗날 김준엽은 이를 자신의 최고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라고. 파일:반대데.pngl200pxlcenterl졸업식에서 총장사임 반대데모

4. 말년


독립운동


기타

그의 타계 당시 고려대학교에서는 학교장을 치르지 않았다. 이를 두고 '김준엽과 이사회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인이 별세하기 약 반년 전, 2010년 11월에 김준엽 구순 기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봉정식이 있었을 때 고려대의 전현직 총장을 비롯, 사학과, 한국사학과 등의 각계 교수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당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김준엽 선생의 사학과 제자였던 김정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2년 6월 고려대에서는 김준엽 전 총장 서거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23년 8월 25일부터, 약 1주일 동안 고려대에서 여러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의 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재학생이었던 이진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장, 김영춘 전 국회의원 등이 기념 사업을 주도한다.

생전에 장준하의 생애 관련으로 인터뷰를 많이 받았는데 그는 "나도 중국 땅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내가 뭘 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장준하만 물어보더라" 라고 서운해하기도 했다.

선생은 초년기에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였지만, 광복 이후 현실 문제에 참여하기 보다는 학자 본연의 길에 충실했다. 그래서인지 생전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다.[40]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수립, 발전을 위해 일생을 교육에 투신하여 역사에 남는 길을 선택했고, 이러한 점이 인정받으면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자 스승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명이인으로 K리그에서 뛰고있는 김준엽 선수가 있는데 그의 부친이 김준엽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 깊이 감명 받아 아들의 이름을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강장자 역을 맡았던 배우 김성옥이 이 사람의 고려대학교 사학과 평교수시절 가르쳤던 제자였다고 한다. 김준엽 본인도 회고록 <장정>에 손숙, 김성옥 부부와의 두터운 친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도 했다.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절친 최기일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김준엽은 굉장한 할리우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최기일은 김준엽과 같이 신의주고등보통학교와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같이 수학한 사이인데다가 신의주고보시절에 삼총사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웠던 절친이라 학창시절의 김준엽의 면모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는데, 김준엽은 교칙도 거의 어기지 않는 모범생이었지만 영화를 볼 때만큼은 교칙을 어겨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변장하고 극장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할리우드 영화광이었던만큼 미국 영화 잡지도 자주 사서 읽었으며, 미국의 압도적인 영화제작 기술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에서 연일 자기들이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거짓선전을 계속하던 때에도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경험에 입각해서 일본은 미국이랑 붙으면 국력의 차이때문에 분명히 질 거라고 자주 예측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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