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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 |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 |
2023년 11월 29일 (수) 13:38 판
컨텐츠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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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구조
클래스(Class)
클래스 | 설명 | 노드 |
---|---|---|
주제 |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 |
항쟁 |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
사건 |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 |
지역 |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
마산, 부산, 광주 |
인물 |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 |
관계성(Relation)
- ~은 ~에 속한다
-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
- 해당노드:
- 4.19혁명 -> 민주항쟁
- 부마항쟁 -> 민주항쟁
- 5.18민주화운동 -> 민주항쟁
- 6월 민주항쟁 -> 민주항쟁
- 전두환 -> 신군부
- 해당노드:
-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
- ~은 ~의 원인이다
-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
-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
- ~은 ~을 발생시켰다
-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
-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
- ~은 ~에 참여했다
- 설명: 사건에 참여한 인물을 설명한다.
- 설명: 사건에 참여한 인물을 설명한다.
- ~은 ~에 희생되었다
-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
- 김주열 -> 3.15의거
- 이한열 -> 6월 민주항쟁
- 박종철>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
- '~은 ~에서 일어났다
- 설명:
기여
4.19혁명
타임라인
원인
전개
의의
부마항쟁
타임라인
원인
전개
의의
5.18민주화운동
타임라인
원인
유신체제의 붕괴
대통령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는데, 총학생회가 이 훈련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
1980년 봄의 광주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
이날 오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 신우식 7공수여단장이 머리를 맞대고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