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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9일 (월) 11:19 판

<翻方曲>

한글원문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날이가 여기소서

한문번역시

折杨柳寄与千里人
为我试向庭前种
须知一夜新生叶
憔悴愁眉是妻身

구조분석

주어(S) 부가성분(Adj) 술어(V-v) 목적어(O) 보어(C) 뒷성분
ES(我) 折[DO] 杨柳
ES(我) 寄[DO] EO(杨柳) 与千里人
ES(千里人) 为我 试[CAU-BEC] 向庭前种
ES(千里人) 知[BEC] 一夜新生叶
憔悴愁眉 是[BE] 妻身



<送别>

한글번역시

옥 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지며 한양을 나서는데
새벽 꾀꼬리 한없이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비단 적삼의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불빛 아스라한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

한문원문시

玉颊双啼出凤城
晓莺千啭为离情
罗衫宝马汀关外
草色迢迢送独行

구조분석

주어(S) 부가성분(Adj) 술어(V-v) 목적어(O) 보어(C) 뒷성분
ES(尔) 玉颊双 啼[DO]
ES(尔) 出[BEC] 凤城
晓莺 啭为离情[DO]
ES(我) EV(着[DO]) 罗衫宝马 汀关外
草色 迢迢[BE]
ES(我) 送[DO] EO(尔) 独行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

홍랑

16세기 후반에 함경도 홍원(洪源)에서 기생으로 활동하였음. 당대의 문사로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과의 사랑으로 유명했던 인물임. 1573년 가을 북해(北海) 평사(評事)로 경성(鏡城)에 있던 최경창이 이듬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영흥(永興)까지 따라가 배웅한 뒤 귀가할 때 함흥(咸興) 70리 밖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까지 내리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시조 「묏버들 갈해 것거」를 짓고, 이 시조와 함께 버들을 꺾어 최경창에게 보냈다고 함. 그와 이별한 후 그를 그리워하며 지내다가 2년 후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곁으로 가서 임종까지 병구완을 하였다 함.

최경창은 「묏버들」 시조를 한역하여 한역시 「절양류기여천리인 위아시향정전종 일야신생엽 초췌수미시접신(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接身)」을 지었다고 전함. 홍랑 [洪娘] (한국여성문인사전, 2006. 11. 28.,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화연구소)


최경창

조선 중기 시인. 전라도 영암 출생.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충(沖)의 18대손이며 자(滋)의 13대손으로, 수인(守仁)의 아들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이며, 백광훈(白光勳)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고, 예조 · 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되었는데 뜻밖의 외직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 가난에 시달리다가 다음해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1582년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수(特授)하였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자 대간에서는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삼기 시작하였으므로 성균관직강으로 명을 고쳤다. 이에 상경 도중 종성객관에서 객사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笠)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수창(酬唱)하였으며, 또한 정철(鄭澈) ·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였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 ·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종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 [崔慶昌]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홍랑과 최경창의 연정

파주에는 ‘홍랑문화예술제’라는 축제가 있다. 홍랑은 조선 선조 때 미모와 기예와 문장이 뛰어난 함경도 경성의 관기였다. 그런 홍랑이 1573년(선조 6년) 함경도 경성에 북도평사로 부임하는 당대 8대 문장가인 35세의 고죽 최경창(1539~1583)을 홍원현감이 베풀어준 연회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연회가 시작되고 술잔이 돌아가며 흥취가 일자, 홍랑이 먼저 시조 한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홍랑이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조가 바로 자신의 작품임을 알고 고죽은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누구의 시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홍랑은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고 답했고, 고죽은 자신이 고죽임을 밝히면서 당대 최고의 시인과 기생 시인의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두 사람은 군막에서 2년여 꿈같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고죽이 변방에서 임기가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관기의 신분인 홍랑은 경성 관할 지역의 경계인 함관령(咸關嶺)까지만 배웅할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길이 함관령에 이르러 홍랑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마음이 아팠다. 홍랑이 복받치는 서러움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의 서러운 심정을 위로라도 하듯이 사방에 산버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홍랑은 버들 한 묶음을 꺾어 고죽에게 건네며 구슬픈 어조로 읊조렸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묏버들 가려 꺾어’라는 시조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고죽이 한양으로 돌아가고 2년 후 그가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 고죽의 집에 당도하여 병수발을 들었다. 병은 호전되어 고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고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두 사람의 재회가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채 안된 국상 기간이었고,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한양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양계의 금’을 어겼으므로 고죽을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상소가 올라와 고죽은 파직당하고 홍랑은 함경도 경성으로 쫒겨났다.
이후 고죽은 종성부사로 복직하였고, 다시 성균관 직강으로 부임하던 중 종성객관에서 45세를 일기로 객사하였다. 고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 몸으로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홍랑은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자신의 예쁜 얼굴에 칼로 수많은 상처를 내어 추녀로 만들어 버리고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한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시집을 지고 함경도 홍원으로 피신했다가, 7년 전쟁이 끝난 후 고죽의 유작들을 해주최씨 문중에 전한 뒤 고죽의 무덤 앞에서 자진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그로 인해 고죽의 문장들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져 주옥같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된 홍랑의 러브스토리는 해주최씨 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에서는 고죽과 정실부인 임씨와의 합장묘 아래에 홍랑의 묘를 쓰고 매년 제를 올린다고 한다.
‘詩人洪娘之墓’라 새긴 묘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버들가’와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약 450여 년 전 조선시대 때 우리 선조들의 사랑이야기이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작은 울림이 아닐까 싶다.


동영상 자료

KBS 한국사전 – 시인과 기생, 사랑으로 시대를 넘다 최경창과 홍랑 / KBS 2008.7.19 방송


명시로 남은 홍랑의 연정


홍랑_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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