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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翻方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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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원문시 ===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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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br>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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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가 여기소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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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번역시 ===
 
折杨柳寄与千里人<br>
 
折杨柳寄与千里人<br>
 
为我试向庭前种<br>
 
为我试向庭前种<br>
 
须知一夜新生叶<br>
 
须知一夜新生叶<br>
 
憔悴愁眉是妻身<br>
 
憔悴愁眉是妻身<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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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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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어(S) !! 부가성분(Adj) !! 술어(V-v) !! 목적어(O) !! 보어(C) !! 뒷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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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我) ||  || 折[DO] || 杨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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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我) ||  || 寄[DO] || EO(杨柳) || 与千里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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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千里人) || 为我 || 试[CAU-BEC] || 向庭前种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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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千里人) || 须 || 知[BEC] || 一夜新生叶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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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憔悴愁眉 ||  || 是[BE] ||  || 妻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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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送别> ==
 
== <送别> ==

2023년 6월 19일 (월) 05:51 판

<翻方曲>

한글원문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날이가 여기소서

한문번역시

折杨柳寄与千里人
为我试向庭前种
须知一夜新生叶
憔悴愁眉是妻身

구조분석

주어(S) 부가성분(Adj) 술어(V-v) 목적어(O) 보어(C) 뒷성분
ES(我) 折[DO] 杨柳
ES(我) 寄[DO] EO(杨柳) 与千里人
ES(千里人) 为我 试[CAU-BEC] 向庭前种
ES(千里人) 知[BEC] 一夜新生叶
憔悴愁眉 是[BE] 妻身

<送别>

옥 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지며 한양을 나서는데
새벽 꾀꼬리 한없이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비단 적삼의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불빛 아스라한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

玉颊双啼出凤城
晓莺千啭为离情
罗衫宝马汀关外
草色迢迢送独行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洪娘

파주에는 ‘홍랑문화예술제’라는 축제가 있다. 홍랑은 조선 선조 때 미모와 기예와 문장이 뛰어난 함경도 경성의 관기였다. 그런 홍랑이 1573년(선조 6년) 함경도 경성에 북도평사로 부임하는 당대 8대 문장가인 35세의 고죽 최경창(1539~1583)을 홍원현감이 베풀어준 연회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연회가 시작되고 술잔이 돌아가며 흥취가 일자, 홍랑이 먼저 시조 한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홍랑이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조가 바로 자신의 작품임을 알고 고죽은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누구의 시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홍랑은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고 답했고, 고죽은 자신이 고죽임을 밝히면서 당대 최고의 시인과 기생 시인의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두 사람은 군막에서 2년여 꿈같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고죽이 변방에서 임기가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관기의 신분인 홍랑은 경성 관할 지역의 경계인 함관령(咸關嶺)까지만 배웅할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길이 함관령에 이르러 홍랑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마음이 아팠다. 홍랑이 복받치는 서러움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의 서러운 심정을 위로라도 하듯이 사방에 산버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홍랑은 버들 한 묶음을 꺾어 고죽에게 건네며 구슬픈 어조로 읊조렸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묏버들 가려 꺾어’라는 시조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고죽이 한양으로 돌아가고 2년 후 그가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 고죽의 집에 당도하여 병수발을 들었다. 병은 호전되어 고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고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두 사람의 재회가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채 안된 국상 기간이었고,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한양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양계의 금’을 어겼으므로 고죽을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상소가 올라와 고죽은 파직당하고 홍랑은 함경도 경성으로 쫒겨났다.
이후 고죽은 종성부사로 복직하였고, 다시 성균관 직강으로 부임하던 중 종성객관에서 45세를 일기로 객사하였다. 고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 몸으로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홍랑은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자신의 예쁜 얼굴에 칼로 수많은 상처를 내어 추녀로 만들어 버리고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한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시집을 지고 함경도 홍원으로 피신했다가, 7년 전쟁이 끝난 후 고죽의 유작들을 해주최씨 문중에 전한 뒤 고죽의 무덤 앞에서 자진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그로 인해 고죽의 문장들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져 주옥같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된 홍랑의 러브스토리는 해주최씨 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에서는 고죽과 정실부인 임씨와의 합장묘 아래에 홍랑의 묘를 쓰고 매년 제를 올린다고 한다.
‘시인홍랑지묘’라 새긴 묘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버들가’와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약 450여 년 전 조선시대 때 우리 선조들의 사랑이야기이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작은 울림이 아닐까 싶다.


동영상 자료

명시로 남은 홍랑의 연정
홍랑_임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