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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사건==
 
==배경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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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 운동은 ‘광주민중항쟁’, ‘광주시민항쟁’, ‘광주항쟁’, ‘광주의거’ 등으로 불리우나, 과거에는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배경사건과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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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18광주민주화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49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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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10시 무렵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에게 폭언과 구타를 가하기까지 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내로 쏟아져 나와 스크럼을 짜며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이러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적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고,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함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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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새벽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결국 발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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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19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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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늦은 저녁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지만 시민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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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과의 긴장이 계속되던 5월 26일 새벽,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맨몸으로 나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며,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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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특공대가 투입되고 만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나기 시작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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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은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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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518광주민주운동기록관[https://www.518archives.go.kr/index.do?PID=003]<ref>
  
 
==평가==
 
==평가==

2022년 12월 20일 (화) 22:47 판


개요

1980년에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제작하였고, 잊혀선 안 될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사람들에게 다시 환기시킨 영화이다.

평점

IMDs사이트 기준 6.9/10

줄거리

1980년 5월, 광주. 광주에 사는 택시기사 민우( 김상경 분).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끔찍이 아끼는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둘이 사는 그는 오직 진우 하나만을 바라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 분)를 맘에 두고 사춘기 소년 같은 구애를 펼치는 그는 작은 일상조차 소중하다. 이렇게 소소한 삶을 즐기는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무고한 시민들이 총,칼로 무장한 시위대 진압군에게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눈 앞에서 억울하게 친구, 애인, 가족을 잃은 그들은 퇴역 장교 출신 흥수(안성기 분)을 중심으로 시민군을 결성해 결말을 알 수 없는 열흘 간의 사투를 시작하는데… [1]

등장인물

안성기(박흥수 역) 김상경(강민우 역) 이요원(박신애 역) 이준기(강진우 역)

배경사건

5·18광주민주화 운동은 ‘광주민중항쟁’, ‘광주시민항쟁’, ‘광주항쟁’, ‘광주의거’ 등으로 불리우나, 과거에는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18광주민주화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2]<ref> 5월 18일 10시 무렵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에게 폭언과 구타를 가하기까지 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내로 쏟아져 나와 스크럼을 짜며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이러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적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고,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함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결국 발포하기에 이른다. 고등학생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19일에 사망했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늦은 저녁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지만 시민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계엄군과의 긴장이 계속되던 5월 26일 새벽,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맨몸으로 나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며,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특공대가 투입되고 만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나기 시작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은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ref>518광주민주운동기록관[3]<ref>

평가

흥행

가격

  1. 출처: '네이버 영화 화려한휴가 정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