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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2일 (금) 06:48 판
심우장(尋牛莊) 소개
심우장(尋牛莊)은 한용운의 사저이며, 1933년에 건물이 세워진 뒤로 1955년 한용운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2년 동안 그가 거주한 장소이다.
| 주소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
| 건축 시기 | 1933년 |
| 문화재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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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유래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름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찾을 심(尋), 소 우(牛), 전장 장(莊)으로 소 찾는 집이란 뜻이다. 한용운의 가택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이유는 불교에서 소가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려지다시피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선 승려이기도 했기에 불교적 개념을 차용해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심우(소를 찾는다), 즉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라는 이름을 붙힌 것으로 보인다.
건축
배경
1933년, 옥고를 겪은 후 한용운은 간호사로 근무하던 유 씨와 재혼한 뒤였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은 사정에 사는 집이 마땅치 않자, 벽산 스님이 그에게 집을 지을 땅을 제공한다. 건축에 필요한 돈은 총 1,000원이었는데, 이마저도 부족해 한용운과 부인이 각각 200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200원, 제자 모금 100원에 더해 남은 300원은 저당으로 마련하여 심우장을 건축하게 되었다.
크기
대지면적 약 364㎡, 건축면적 약 81㎡, 실내 사용 면적 약 59㎡
구조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방 배치로 'ㄴ'자를 뒤집어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한옥이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소박한 규모로, 한용운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북향
당시 한옥의 대부분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반대로 심우장은 의도적으로 북향으로 지어졌다. 이는 한용운이 독립운동가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데, 남향으로 집터를 잡으면 당시 남쪽에 위치했던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하게되므로 이를 일부러 피해 북향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판
한용운이 거처하던 사랑채 밖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한 서예가 오세창이 직접 작성한 현판이 걸려있다.
심우장에서의 한용운
한용운은 여러 인물의 도움을 받아 심우장을 지어 1933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여기서 거주한다. 심우장이 산 중턱에 자리한 집임에도 평소 한용운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기에, 찾아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문학인, 종교인과 독립운동가는 물론 연애 문제, 자식 문제와 같은 다양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1944년 6월 29일, 중풍을 앓던 한용운은 조용히 심우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남은 가족 중 그의 딸은 심우장에서 계속해 거주했고, 아들은 건너편에 일본대사관이 들어서자 심우장을 떠났다고 한다.
운영 정보
| 항목 | 내용 |
|---|---|
| 관람 가능 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 관람료 | 무료 |
| 찾아가는 법 |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2112번, 1111번을 타고 ‘서울다원학교’에서 하차, 300m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됩니다. |
| 전화번호 | 02-2241-26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