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李陸史)"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76번째 줄: | 76번째 줄: | ||
<p> | <p> |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
| − | + | </p> | |
| 83번째 줄: | 83번째 줄: | ||
<p> | <p> |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 ||
| + | </p> | ||
2025년 12월 10일 (수) 17:08 판
기본 정보
| 항목 | 내용 |
|---|---|
| 본명 | 이원록 |
| 출생 | 1904년 5월 18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 |
| 사망 | 1944년 1월 16일 |
생애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
이육사의 기자 생활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
이육사의 '청포도'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타임라인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
1. 청포도 문학공원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2. 이육사문학관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3. 이육사 생가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4. 문화공간 이육사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5. 264작은문학관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