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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근대화 및 불교 정화운동''': "염불 중심의 의례 불교" 비판하며 참선과 실천을 강조했다. 일본식 불교에서 탈피하고 자주적인 조선 불교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 * '''불교 근대화 및 불교 정화운동''': "염불 중심의 의례 불교" 비판하며 참선과 실천을 강조했다. 일본식 불교에서 탈피하고 자주적인 조선 불교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 ||
| − | * '''교육정책가로서''': 동국대학교의 재건과 발전을 주도했으며, 문교부의 장관으로 대한민국의 기초 교육정책의 기반을 마련했다 | + | * '''교육정책가로서''': 동국대학교의 재건과 발전을 주도했으며, 문교부의 장관으로 대한민국의 기초 교육정책의 기반을 마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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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4일 (수) 09:48 판
소개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일제강점기에는 불교계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문교부 장관, 교육자, 불교 개혁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용운의 제자로서 민족불교와 불교의 근대화에 헌신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문교 행정을 주도하였다.
그의 본명은 김광제(金光濟)**이며,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범산(梵山), 필명은 김철아(金哲兒)이다.
생애
주요 연보
| 연도 | 주요 사건 및 활동 |
|---|---|
| 1899 | 경상북도 영천에서 출생 |
| 1913~1917 | 은해사에서 출가, 범어사 승적 취득, 불교중앙학림에서 수학 |
| 1919 | 3·1운동 참여, 범어사 만세운동 주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
| 1920~1927 | 중국과 프랑스 유학, 국제불교회의 등 다수 국제회의 참가 |
| 1928~1930 | 귀국 후 불교계 활동 재개, 만당(卍黨) 조직, 조선불교청년회 활동 |
| 1938~1945 | 만당사건 및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 |
| 1945~1964 | 불교계·교육계·정치계에서 활동, 동국대학교 총장 등 역임 |
| 1995 |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주요 활동
- 출생과 유년기: 1899년 9월 27일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유학을 배우고, 이후에 불교애 귀의해 한용운의 문하에서 불교를 배웠다.
- 불교 수학과 출가: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초반에 걸쳐 불교 개혁에 뜻을 두고 은해서에서 출가했으며, 범어사 승적을 취득하고 불교중앙학림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했다. 이 시기 그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민족 불교와 수행 불교의 이상을 품었다.
- 독립운동 참여: 불교 승려로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3월 4일 김상헌과 함께 부산 범어사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불교계 대표로서 문화와 교육 관련 활동을 수행하였다.
- 유학: 1920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한 뒤, 유법장학회의 지원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파리대학교 부설 외국인학교와 소르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6년 7월에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프랑스 은행에 근무하였다.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 ‘아시아민족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 귀국 후 활동: 그는 불교계 잡지 『불교』에서 학술부를 담당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학회가 주관한 조선어편찬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일본 고마자와대학교에 유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1930년 5월, 국내에서 만당(卍黨)이 결성되자 일본 유학생 중심으로 만당 일본지부를 조직,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지부장을 맡았다. 1932년 귀국 후에도 불교 청년 운동을 이어갔으며, 1938년 말 만당 관련 혐의로 3개월간 투옥되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 해방 이후: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조선불교 총무원 중심으로 불교계 재건을 주도하였고,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교육계에서도 활동하였다. 1949년에는 대한민국 제2대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되어, 교육 및 문화 정책의 기초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말년: 이후 불교계 원로로 정화 운동과 교육 진흥에 헌신하였으며, 1964년 3월 14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즉 그는 불교계에서는 전통과 개혁을 잇는 중간 지점에서 의미 있는 역할 수행했고, 독립운동사에서는 임시정부 불교계 대표자이자 후속 교육·문화 기반 구축에 공로를 세웠으며, 교육사에서는 해방 후 교육정책의 기반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았다.
사상과 활동
- 민족불교론: 불교가 단지 수행의 길만이 아니라, 민족 해방과 계몽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한용운의 사상을 이어받아, 수행·교육·정치 참여를 아우르는 불교를 지향했다.
- 불교 근대화 및 불교 정화운동: "염불 중심의 의례 불교" 비판하며 참선과 실천을 강조했다. 일본식 불교에서 탈피하고 자주적인 조선 불교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 교육정책가로서: 동국대학교의 재건과 발전을 주도했으며, 문교부의 장관으로 대한민국의 기초 교육정책의 기반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