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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1일 (토) 02:38 판

개요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비밀결사체로, 일제 강점기 초기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조직이다.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항일 단체 최로로 민주 공화정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당시 보안법과 신문지법 등으로 비밀결사 단체로 조직되었으나, 합법적 틀 안에서의 자강부터 해외기지건설 추진까지 전방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설립 배경

50px-Quote-left.png 신민회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완고하고 부패한 국민 생활을 개혁할 새로운 사상이 시급히 필요하며, 우둔한 국민을 깨우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이 시급히 필요하고, 식어 버린 뜨거운 마음을 다시 살리기 위해 새로운 제창이 시급히 필요하며, 쇠약해진 원기를 북돋울 새로운 보양이 시급히 필요하고, 타락한 도덕을 되살릴 새로운 윤리가 시급히 필요하며, 쇠퇴한 문화를 부흥시킬 새로운 학술이 시급히 필요하고, 미약한 산업을 일으킬 새로운 모범이 시급히 필요하며, 부패한 정치를 일신할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 50px-Quote-right.png
출처:「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

당시 국내외에 존재했던 애국 계몽 운동 및 독립운동 세력들을 망라하여 결성한 연랍 조직이며, 최초로 설립을 주도한 안창호(安昌浩), 이강, 임준기 등은 1906년 말부터 1907년 초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여, 본국에 안창호를 파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梁起鐸)에게 신민회의 결사를 제안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주요 활동

민족 교육

신민회는 민족의 자강을 위해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신념 아래 교육 사업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대표적으로 1908년 평양에 설립된 대성학교와 정주에 설립된 오산학교는 신민회의 교육 철학을 반영한 상징적인 교육기관이다.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실용적인 학문과 애국심을 동시에 강조한 이들 학교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신민회가 민족 교육을 위해 전개한 더 자세한 활동은 [[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4.1 문단 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을 참고하십시오.

경제적 자립

신민회는 경제적 자립을 통해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고 독립운동의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1908년 5월 평양에 설립된 태극서관은 민족 서적의 출판과 유통을 통해 민족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극서관에서는 서북 지역을 비롯해 전국 각 지역에 설립된 학교에서 사용할 교재를 공급하고 판매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실제로 대성학교와 다른 많은 학교에서 사용된 <한문독본>과 <음빙실문집>등을 판매했다. 서적 외에도 측량 기구, 학용품 등을 판매했다.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실력 양성과 동시에 양기탁(梁起鐸), 신채호, 이동휘 등을 필두로 국외에서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것에도 힘썼다. 이를 통해 만주 삼원보이서 교육기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북만주 밀산부에 개척촌인 한흥동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서 병력을 기르고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자주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해산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인해 강제 해산된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한민족 해방 운동 탄압 목적으로 신민회의 안명근의 독립 자금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대거 체포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윤치호 등의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었다.

의의

신민회는 한국 독립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지만, 신민회가 남긴 민족교육과 조직적 독립운동의 전통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에도 신민회의 정신은 민족 자립과 독립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참고문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