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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화유산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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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c3333">병인양요</font>===
 
===<font color="#cc3333">병인양요</font>===
일본은 조선초기부터 조선의 대장경을 부러워하였고 이러한 기술전수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그 횟수가 무려 107회 다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바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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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br/>
 
실제로 일본은 조선과 사신을 주고받으며 문물교류 형식으로 고려대장경을 비롯한 불교문화재를 보급받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일본의 불교문화를 발달시켜왔다.
 
<br/>
 
그러나 1510년 삼포왜란 이후에는 조선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며 조선의 문화를 수입하기 어려워졌다.
 
  
====약탈을 위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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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반출====
  
이에 따라 일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해 '약탈을 위한 전쟁'의 사전계획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란 당시 장수들에게 도서, 공예, 포로, 금속, 보물, 축부 6개의 특수부대를 조직하였고 조선의 보물들을 약탈했다.
 
<br/>
 
이러한 문화재 약탈 계획에서는 특히 출판 문화유산과 불교 관련 유물에 중점을 두었다.
 
<br/>
 
그 만큼 일본에서는 서적이 귀했으며 조선의 불교 및 서적 양식을 가치 있게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귀한 서적류 약탈을 위해 일본의 승려들을 동원했으며 주요 장수 옆에 위치하여 수 천권의 서적들을 약탈했다.
 
<br/>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난 이후 이러한 약탈 서적들을 몰수하였고 본인이 직접 보관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많은 서적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정치철학과 정책을 만들었고 265년 간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다.
 
<br/>
 
새로운 집권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의 성리학을 수용하여 막부와 각 번의 기초사상을 이루었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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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c3333">일제강점기</font>===
 
===<font color="#cc3333">일제강점기</font>===
일제강점기 전반에 거쳐 일제는 수많은 조선의 문화유산을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문화유산 반출에는 통감부나 조선총독부의 공권력이 행해졌을 뿐만아니라 일본인 개인의 도굴이나 밀거래 등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br/>이들은 당시 문화재의 이동이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반출해갔다.
 
<br/>일본인들이 반출해간 문화유산에는 고적조사 중 발견된 유물, 석조유물, 건조물, 도자기, 서적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현재까지 파악된 반출 수량은 약 7만 여점에 이른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토 히로부미 다음으로 부임한 조선통감과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통감과 총독의 지위를 이용해 문화재를 열심히 수집하고 반출하였다
 
 
그가 가져간 문화유산은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소중한 공예품을 비롯해 그림, 글씨, 서적 등 1,500여 점에 달한다.
 
 
이렇게 반출된 문화유산은 데라우치의 고향인 야마구치에 세운 도서관에 '오호 데라우치 문고'에 소장돼 있었다.
 
<br/>
 
이 도서관은 데라우치 가문에서 운영해다가 데라우치가 죽자 인근에 세워진 아마구치 대학에 기증되었다.
 
<br/>
 
이 가운데 그나마 135점의 문화유산만이 1996년 데라우치 문고에서 경남대학교로 기증되었다.
 
 
====야마나카상회====
 
야마나카상회는 일제강점기 고미술 무역상이다.
 
 
오사카의 고미술상인 야마나카 데이지로가 1894년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에 점포를 차려 수집가들에게 팔았다.
 
<br/>
 
특히 1923~36년 일본을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대전람회를 개최하여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서구와 일본에 반출하였다.
 
 
당시 많은 문화유산들이 일본인 또는 도굴꾼 등에 의해 뜯겨지고 빼돌려져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
 
<br/>이들 문화재 중 상당수가 일본의 미술품상 야마나카상회에 넘겨졌고 야마니카 상회는 약탈 문화재를 수리하거나 보정한 뒤 일본인에게 되팔거나 미국 경매시장에 넘겼다.
 
 
=====전세계로 유출된 문화유산=====
 
그러던 중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정부는 야마나카상회가 미국내에 보관하던 모든 문화재를 몰수하였고 패전국인 일본의 재산으로 전락하였다.
 
<br/>
 
패전국의 자산으로 인식된 이 문화유산들은 결국, 모두 뉴욕 경매시장에서 처분됐다. 이때 약탈된 문화재 상당수가 일본,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을 유랑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구라 다케노스케====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이다.
 
 
그는 대구에서 대흥전기, 남선합동전기라는 조선 최대의 전기회사를 설립한 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br/>이를 바탕으로 1921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유물을 수집하여 일본과 대구의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라는 재단을 설립하였다.
 
<br/>그가 죽고 재단은 아들에 의해 운영되어 오다가 1982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 3층 동양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대부분 정당한 매입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도굴에 의한 것이다.
 
<br/>실제로 그가 거주했던 대구와 서울의 집앞에는 골동상인과 도굴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고
 
<br/>조선인 도굴꾼들도 고용하여 고분의 유물들을 쓸어갔다고 한다.
 
 
그가 수탈해간 유물의 공식적인 숫자는 광복 후 가져가지 못한 것, 대구의 자택에서 발견된 것,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포함하면
 
<br/>2천 2백여 점으로 파악하지만 숨기고 있는 유물까지 포함한다면 4천 여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f>대구의 자택에서 발견된 것도 수도 공사를 하다가 매장해놓은 유물들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숨겨놓은 유물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ref>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 시 한국 측에서 불법 유출된 문화재로서 반환을 요구했으나 사유 문화재라는 이유로 반환되지 못했다.
 
<br/>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어 국유재산이 된 후 우리나라에서 반환을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반환되지 않고 있다<ref>사유재산이라는 명목으로 반환을 거부했지만 국유재산이 된 이후에도 반환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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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 23:59 판

프랑스의 문화유산 반출


병인양요

병인양요

민간 반출

일제강점기


참고문헌

김정숙. 2018. 「임진․정유재란기 약탈된 출판문화재에 관한 연구」. 한국출판학연구, 44(5). 5-27.
박진이. 2016. 「일제강점기 문화재 반출과 조선인의 대응」. 국내석사학위논문 강원대학교, 강원특별자치도.
이은화. 2019. 「한국문화재의 일본 반출과 환수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