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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4일 (수) 10:30 판
목차
학교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 ||
---|---|---|
한자표기 | 延禧專門學校 | |
설립일 | 1915년 | |
설립자 |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
설립위치 | 종로 YMCA | |
계승 | 연세대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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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1915년 조선기독교학교로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세브란스
세브란스 | ||
---|---|---|
한자표기 | ||
설립일 | 1885년 | |
설립자 | 알렌(Allen,H.N.) | |
설립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07-10 | |
계승 | 연세대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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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다.
독립운동
3.1운동
세브란스의전 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총 12명으로, 그 중 9명은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다. 연희전문학교에선 김원벽이 3.1운동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독려했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의 만세운동은 학내 YMCA 조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3.1운동의 가두시위를 이끈 사람 중 한 명은 세브란스의 전 YMCA의 회장 이용설이었고, 그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도 맡아 수행했다. 당시 전문학교들은 3.1운동 이후에도 학내 조직을 통한 2차시위를 계획했는데, 3월 5일 있었던 2차 시위는 당시 세브란스 YMCA의 회장이었던 김문진이 이끌었다. 연희전문학교 YMCA 간부인 정석해도 3월 5일 시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참가하였으며, 회장이었던 이병주는 김원벽을 도와 두 차례의 시위를 알리고 학생들을 결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6.10 만세운동
1926년 순종을 서거일을 맞아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주도한 만세운동으로, 40여명이 연희전문학교 학생 박하균의 집에 모여 결의하며 시작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이병립과 박하균은 수만 매의 격문과 태극기 200여장을 제작하였다. 순즁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으로 83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그 중 37명이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이었다.
기타
세브란스의 전임기사였던 이일선, 조선어 교수였던 유희경등은 1919년 4월 <독립신문>, <반도목탁>, <국민신보>등을 발간하고 배포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국민신보>와 <국치기념특별호>와 같은 저작물을 배포하였다.
출신인물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선교사이자 세브란스의전의 교수이다. 이갑성에게 부탁을 받고 3.1 운동의 사진을 찍었으며, 제암리교회 방화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중국의 영자신문에 기사로 실었고, 수촌리 학살등의 사건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미국의 장로회 신문에 실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제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하여 여러 외신에 기고하고 다양한 곳에서 연설하였다. 그러나 반일적 태도가 선교부에 부담이 되어 1920년 캐나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일제를 고발하는 글을 기고하였으며 해방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를 지내다 1970년 사망하였다.
유기준
1919년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3.1운동을 주도한 인원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해 상해로 망명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연통제 평안남도 특파원직을 맡아 다시 입국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계몽과 선전, 임시정부의 정책 계몽, 독립사상의 고취, 연통제 및 교통국의 설치, 국내 지도자와의 협의, 독립운동 단체조직, 정세 파악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평양 기성의원에서 체포되었으나 취조 중 탈주하여 1920년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원 서기일을 하다 귀국하여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에서 상의원, 효율적인 독립운동 추진을 위한 시사책진회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로인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941년 출소하였다.
이갑성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당시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후 학교의 제약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손병희의 독립운동계획에 참여하였고, 독립선언서를 곳곳으로 교부하였다. 대구, 마산, 군산등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냈으며 세브란스의전 학생과 서울에 있는 동료에게 수백매씩을 배분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하러가다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