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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2일 (토) 22:13 판
요약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배경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1세 1원 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서울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는 군제 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 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에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접선하도록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00여 명과 포(砲) 1문을 러시아 공사관의 방위를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로 표기되어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렀다.
전개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 내각에 참여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법부대신 장박(張博)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살해하였고, 피신한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다음날 용인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잠적했던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
이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친미파 인사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일본 군대는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 각서(서울의정서), 6월에 로바노프(Lobanovr)-야마가타(山縣有明) 의정서(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균형을 합의하였다. 이에 고종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민영환의 귀국길에 동행시키는데 그쳤다. 고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800여 명을 선발하여 호위병으로 훈련시켜 환궁에 대비하였다.
결과와 영향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최혜국대우를 통상 조약에 포함시켰던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울러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이 초빙되었고, 중앙 군제와 무기가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러시아 등 외국의 이권 취득은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외국 공사관 거주에 따른 국격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은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여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로써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이 막을 내렸다.
관련 자료
참고문헌
이전 문서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