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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바틴이 건축에 관여했음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물은 관문각과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이 외에 사바틴이 관여했음이 추정되는 건물로는 덕수궁의 독립문, 중명전, 정관헌과 손탁호텔, 제물포구락부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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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청은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 및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해「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부제: 사바틴이 남긴 공간과 기억)」특별전을 개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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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2) 14세 때 상선단의 소년수부가 되었으며, | 다.12) 14세 때 상선단의 소년수부가 되었으며, |
2024년 6월 7일 (금) 16:47 판
개요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Афанасій Іванович Середін-Сабатін)은 근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건축학계의 사바틴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들어서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 러시아에서의 이력이나 건축 수준 등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출생: 1860. 1. 1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브니
- 사망: 1921. 1. 1 러시아 볼고그라
생애
1883 조선 입국, 인천해관 직원으로 근무 1888 궁궐 건축 참여 1895 을미사변 목격 1899 조선 재입국 1904 러일전쟁 후 한반도 떠
건축
사바틴이 건축에 관여했음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물은 관문각과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이 외에 사바틴이 관여했음이 추정되는 건물로는 덕수궁의 독립문, 중명전, 정관헌과 손탁호텔, 제물포구락부 등이 있다.
구 러시아 공사관
문화재청은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 및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해「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부제: 사바틴이 남긴 공간과 기억)」특별전을 개최했다.
각주
[[분류:]
사바찐은 1860년 우크라이나 뽈따바(Poltava)주의 몰락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
다.12) 14세 때 상선단의 소년수부가 되었으며,
상뜨-뻬쩨르부르그에 있었던 항해사 양성 강
습소(maritime classes)13)를 수료하였다. 지금
까지 잘못 알려져 온 바와 같이 “2급 자격증
을 수여하는 러시아 육군유년학교 공병과를 나
왔다”14)는 것은 1895년 9월 그가 당시 조선에
신설되는 러시아어학교의 교사로 자신을 천거
해 달라는 내용의 공사관으로 보낸 서한과 답
변15)에 근거한 것 같다. 여기서 ‘2급 자격증’은
‘항해사 양성 2급(근거리항행 상선 선장 및 원
양항해사 자격)과정’으로 추정된다.
그는 상뜨-뻬쩨르부르그에 있으면서 뻬쩨르
부르그 예술아카데미에 1년간 다녔다한다.
이 예술 아카데미는 1757년 이래 조형예술분
야에서 러시아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1859
년부터는 회화․조각학과, 건축학과 등 두 개
의 학과가 있었으며,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는 예비지식이 요구되었는데 사바찐은 그것
이 없었기 때문에 정규수강생이 될 수 없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되는 야간미술
강좌를 수강하였다.
그는 선박 항해사로 취업17)하였으며 승무원
으로 일하는 동안 극동의 여러 나라들과 도시
들의 건축문화를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해로 진출
하였으며, 자신의 독학, 통찰력, 개인적인 재능,
그리고 선원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
토목 기술자로 변신한 것으로 보인다.
비 유럽권에서 ‘건축’의 전문교육과 ‘건축가’
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
다. 러시아에서는 뾰뜨르 1세때(18세기 초)이
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20세기 초이다. 명동성
당을 비롯한 교회건축의 설계자는 경리관계일
을 맡은 아마추어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름 있는 공공건물들도 공식적인 자격증
이 없는 사람들이 건립한 사례가 많았으며, 사
바찐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당시 각국 정부 혹은 상사의 초청으로 아시
아 여러 지역의 거류지들을 유랑하며 일한 이
들 서양 기술자들은 거류지 건축가(Colonial
Architect), 또는 거류지 기술자(Colonial
Engineer)라 불렀다. 이들에게 맡겨진 일은 도
로 조성, 하천과 항만 준설, 거류지 계획과 측
량 등이었으며 사바찐도 ‘토목사’, ‘건축사’, 영조사 등으로 불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