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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침략전쟁을 위한 일본의 발악이 극에 달하면서 1942년부터는 노골적인 친일 내용을 담은 군국가요만 발매된다. 1940년에 일제는 방송에서 재즈음악을 금지했고,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에 ‘가요곡’이나 ‘신가요’라는 말을 사용하게 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아예 음반 발매를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음반 산업이 완전히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 + | 중일전쟁과 음반 산업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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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년 7월에 발생한 중일전쟁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산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나빠지자 일제는 음반 검열을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1938년에는 금지되는 음반이 크게 늘어났고 새로운 단속 규정도 마련되었다. 일제가 1937년에 설립한 ‘필름레코드 인정위원회’는 영화와 음반 등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를 수행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친일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군국가요’가 등장하였으나, 그 생산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쳤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음반 회사들이 군국가요를 발매하기는 하였으나, 이윤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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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음반 산업이 위축되어 6대 음반 회사 중 한 곳이던 시에론 음반 회사가 1937년에 문을 닫았고, 군소 음반 회사들도 더 이상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다. 또한 유일하게 한국인 자본으로만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뉴코리아 음반 회사도 이 무렵에 폐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오케 음반 회사는 일본 데이치쿠 음반 회사에 운영권을 양도하고 오케의 실질적인 운영자 역할을 하던 이철은 악극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처럼 음반 산업이 주춤하게 된 것은 일본 음반 산업의 구조 조정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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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의 여파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두워지면서 음반 산업이 주춤하는 양상을 드러냈으나, 그 와중에도 신인 가수들이 등장하여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도 했다. 김영춘, 남일연, 박단마, 박향림, 송달협, 이인권, 장세정, 황금심 등이 활동을 시작했고, 작사가 이부풍과 작곡가 이재호, 이봉룡도 작품을 발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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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발매된 대표적인 대중가요를 보면, <연락선은 떠난다>, <물방아 사랑>, <해조곡>, <단장애곡>, <백만원이 생긴다면>, <짝사랑>, <눈물 젖은 두만강>, <왕서방 연서>, <오빠는 풍각쟁이>, <애수의 소야곡>, <알뜰한 당신>, <비오는 선창>, <나는 열일곱 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는 곡들이 많다. 요컨대 중일전쟁의 여파로 음반 회사가 문을 닫고 음반 산업 자체가 위축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신인 가수와 인기곡은 지속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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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례로 백년설의 목소리로 1940년에 발매된 <나그네 설움>은 10만 장 가량 판매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1940년을 전후해서 한 해애 약 100만 장 정도의 음반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중일전쟁 이후에 잠시 주춤했던 음반 산업이 1939년부터 다시 성장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태평 회사가 대중음악 분야에 주력하면서 진방남, 고운봉, 백난아, 태성호 등의 신인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전시체제로 변하면서 사회 · 문화적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침략전쟁을 위한 일본의 발악이 극에 달하면서 1942년부터는 노골적인 친일 내용을 담은 군국가요만 발매된다. 1940년에 일제는 방송에서 재즈음악을 금지했고,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에 ‘가요곡’이나 ‘신가요’라는 말을 사용하게 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아예 음반 발매를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음반 산업이 완전히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 ||
2024년 5월 29일 (수) 19:37 기준 최신판
중일전쟁과 음반 산업의 변화
1937년 7월에 발생한 중일전쟁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산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나빠지자 일제는 음반 검열을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1938년에는 금지되는 음반이 크게 늘어났고 새로운 단속 규정도 마련되었다. 일제가 1937년에 설립한 ‘필름레코드 인정위원회’는 영화와 음반 등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를 수행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친일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군국가요’가 등장하였으나, 그 생산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쳤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음반 회사들이 군국가요를 발매하기는 하였으나, 이윤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음반 산업이 위축되어 6대 음반 회사 중 한 곳이던 시에론 음반 회사가 1937년에 문을 닫았고, 군소 음반 회사들도 더 이상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다. 또한 유일하게 한국인 자본으로만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뉴코리아 음반 회사도 이 무렵에 폐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오케 음반 회사는 일본 데이치쿠 음반 회사에 운영권을 양도하고 오케의 실질적인 운영자 역할을 하던 이철은 악극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처럼 음반 산업이 주춤하게 된 것은 일본 음반 산업의 구조 조정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여파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두워지면서 음반 산업이 주춤하는 양상을 드러냈으나, 그 와중에도 신인 가수들이 등장하여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도 했다. 김영춘, 남일연, 박단마, 박향림, 송달협, 이인권, 장세정, 황금심 등이 활동을 시작했고, 작사가 이부풍과 작곡가 이재호, 이봉룡도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발매된 대표적인 대중가요를 보면, <연락선은 떠난다>, <물방아 사랑>, <해조곡>, <단장애곡>, <백만원이 생긴다면>, <짝사랑>, <눈물 젖은 두만강>, <왕서방 연서>, <오빠는 풍각쟁이>, <애수의 소야곡>, <알뜰한 당신>, <비오는 선창>, <나는 열일곱 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는 곡들이 많다. 요컨대 중일전쟁의 여파로 음반 회사가 문을 닫고 음반 산업 자체가 위축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신인 가수와 인기곡은 지속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일례로 백년설의 목소리로 1940년에 발매된 <나그네 설움>은 10만 장 가량 판매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1940년을 전후해서 한 해애 약 100만 장 정도의 음반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중일전쟁 이후에 잠시 주춤했던 음반 산업이 1939년부터 다시 성장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태평 회사가 대중음악 분야에 주력하면서 진방남, 고운봉, 백난아, 태성호 등의 신인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전시체제로 변하면서 사회 · 문화적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침략전쟁을 위한 일본의 발악이 극에 달하면서 1942년부터는 노골적인 친일 내용을 담은 군국가요만 발매된다. 1940년에 일제는 방송에서 재즈음악을 금지했고,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에 ‘가요곡’이나 ‘신가요’라는 말을 사용하게 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아예 음반 발매를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음반 산업이 완전히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음반 산업이 위축되어 음반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음반을 중심으로 유통되던 대중음악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 타개책으로 음반이 아니라 악극 중심으로 대중음악이 향유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케 회사의 이철이다. 오케 음반 회사는 1933년부터 이미 ‘연주회’라는 명칭을 빌려 전속 예술가의 순회공연을 벌이곤 하였다. 그러다가 음반의 운영권을 데이치쿠 회사에 양도한 후로 이철은 악극 공연에만 주력한다. 이철은 1938년에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데 이어 오케연주단을 오케그랜드쇼로 확대하고, 1939년에는 조선악극단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해외를 돌며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1940년에는 빅타 음반 회사에서 반도가극단을 창단하고 1941년에는 성보가극단, 약초가극단 등이, 1944년에는 신태양악극단과 태평양예능대 등이 결성되어 음반을 대신할 대중음악의 활로가 열렸다. 물론 악극은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연극 등의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되었으나, 그 중심에는 대중음악 가수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