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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는 부산 동래 지방에 전승되어온 탈놀이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의 상원(上元)놀이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동래야류는 말뚝이의 비중을 매우 크게 두고 있다.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으로 양반의 비리를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코가 큰 것은 양반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고, 귀가 큰 것은 양반의 비리를 잘 듣기 위해서이다. 뚜기와 뚜미는 해당 특성을 반영한다. | 동래야류는 부산 동래 지방에 전승되어온 탈놀이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의 상원(上元)놀이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동래야류는 말뚝이의 비중을 매우 크게 두고 있다.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으로 양반의 비리를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코가 큰 것은 양반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고, 귀가 큰 것은 양반의 비리를 잘 듣기 위해서이다. 뚜기와 뚜미는 해당 특성을 반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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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4일 (수) 22:52 기준 최신판
마스코트 소개
양반의 무능과 허례허식을 풍자하고 조롱하던 말뚝이가 동래의 뚜기와 뚜미가 되어, 맑고 큰 눈으로 세상을 직시하고 커다란 귀로 구민의 낮은 목소리, 쓴소리까지 놓지지 않고 전달하는 구민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전통 문화의 고장인 동래의 정체성과 ‘민중의 영웅, 생산적인 비판, 따스한 가슴’의 말뚝이를 뚜기와 뚜미로 친근감있게 형상화하여 탄생하였다.
지자체와의 관련성
지차제 소개
온천장을 비롯하여 관광유적이 풍부하다. 동래온천은 『고려사』 지리지 이후의 여러 사료에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동래부지』(1740)에서는 “열은 달걀을 익힐 만하고 병을 가진 자가 목욕을 하면 문득 낫고 신라시대에는 왕이 자주 행차했다. 벽돌 네 모서리에 구리기둥을 세웠는데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1766년(영조 42) 온정을 지키는 집과 대문을 세웠으며 이때 세워진 온정 개건비(부산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4호)가 지금도 남아있다. 가까이 있는 용각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영으로 온천수를 양수한 자리이다. 1992년 복원하였으며 음력 9월 9일에 용왕제례가 열리고 있다. 동래온천장이 온천으로서 본격적인 발전한 것은 1915년 부산진과 동래 사이 경편궤도가 설치되어 경편기차와 전차가 경편궤도를 겸용하고 부터이다. 그러나 그때의 전차는 동래가 종점이었는데 전차가 온천장까지 연장된 것은 1927년이었다. 현재 허심청, 녹천탕 등의 온천은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명소이다. 온천장 인근의 금강공원에는 금정산성 남문으로 오르는 케이블카가 있어 등산객들과 시민들이 자주 이용한다.
동래의 전통음식으로는 동래파전이 있다. 동래파전은 해산물과 육지의 산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 육지 산물로는 조선파와 미나리로 이들이 가장 향취를 돋울 때는 겨울을 지나 새순이 땅내음을 풍길 때이다. 과거에 동래파전이 봄 한철만 성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해산물로는 굴, 홍합 등을 이용한다.
특산물로 동래 담뱃대와 유기가 있다. 동래지방에는 일찍부터 담뱃대를 만드는 수공업이 성행하여 부산지방의 주체적 수공업의 대종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연관이란 이름으로 불린 담뱃대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는 확인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울산 병영에는 무기제작창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동래지방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대략 150년 정도 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담뱃대와 함께 동래의 명물로 손꼽혔던 것은 유기이다. 백동으로 만든 수저와 밥그릇은 동래의 것이 가장 모양이 좋았으며, 유기에 색깔과 무늬를 넣는 정교한 세공은 전국에서도 유명하였다.
전통적으로 계승되던 춤으로 동래고무가 있다. 연원은 고려시대 교방청 여기들에 의해 추어지던 무고에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의 시중 이혼이 귀양살이를 하던 중, 바다에 떠내려 온 큰 뗏목으로 북을 만들어 치고,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춘 것에서 유래되었다. 1920년대에 권번이 창설되면서 광복 직후까지 전승되다가 중단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해 1993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관내에서는 매년 3월 3·1절 축제와 10월 동래 읍성 축제가 개최된다. 동래읍성 축제는 동래읍성 북문광장, 문화회관, 온천천 등 동래 일원에서 진행되며 동래부사행렬, 영화제, 동래성전투재현, 동래장터운영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천동에는 시립박물관 복천동분관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야박물관 중 하나이다. 동래고분 일대의 발굴이 완료되어 1981년 사적 제273호로 지정 고시되면서 이곳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복천동고분 유물의 전시를 전시하여 향토사 인식의 교육장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대상 유물은 1508점이다.
온천동의 금강공원 내에는 부산민속예술관이 있다. 동래의 전통민속예술의 발굴과 계승·보급을 위해 1976년에 개관하였다. 그 주요 민속예술에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인 동래야류와 부산시 무형문화재 지정 제3호인 동래학춤, 제4호인 동래지신밟기, 제10호인 동래고무, 제8호인 가야금산조들로써 부산민속예술보존회가 이곳에서 전수를 하고있다. 한편 온천동에는 세계해양생물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에는 현재 약 85개국의 해양생물표본 2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관내에는 여러 식생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명륜동 동래향교 안의 명륜당 서쪽에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3.1m, 수관 폭 약 11m에 이르며 수령은 25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낙민동의 낙민동 팽나무는 높이는 16m, 가슴높이 둘레 2.6m, 수관폭 약 20m, 수령은 2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안락동에 소재한 회화나무는 동래고등학교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7m에 가슴높이 둘레가 2.8m나 된다. 이 나무의 수관 폭은 약 15m에 이르며 수령은 25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마스코트에 반영된 지자체 특징
동래야류는 부산 동래 지방에 전승되어온 탈놀이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의 상원(上元)놀이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동래야류는 말뚝이의 비중을 매우 크게 두고 있다.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으로 양반의 비리를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코가 큰 것은 양반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고, 귀가 큰 것은 양반의 비리를 잘 듣기 위해서이다. 뚜기와 뚜미는 해당 특성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