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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2일 (화) 11:52 기준 최신판
개요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전개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야, 너도 죽어봐"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