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정화정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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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의 주요 키워드는 '성장'이었다. 수출입국론의 확산,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GDP 1,000달러 달성, 중화학공업화 등 성장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장'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으며 급격한 경제성장과정 가운데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그 대책 역시 '성장'이라는 주요 목표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나올 뿐이었다. 1970년대 이례적인 세계 경제 | + |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의 주요 키워드는 '성장'이었다. 수출입국론의 확산,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GDP 1,000달러 달성, 중화학공업화 등 성장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장'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으며 급격한 경제성장과정 가운데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그 대책 역시 '성장'이라는 주요 목표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나올 뿐이었다. 1970년대 이례적인 세계 경제 대불황<ref>경제위기에 관한 내용은[[오일쇼크]]페이지 참조<ref/>이 찾아오자 선진국의 공업 생산은 1974년 7월부터 1975년 4월 사이 10%가량 감소했으며 선진국의 생산, 국제 무역량까지 모두 감소했다. 이러한 불황은 한국이 경제 정책 노선을 수정하기에 충분했다. 여태까지 이룩한 것만큼의 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말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행정 규제로서의 물가 안정 정책을 전개하였는데, '물가 인상 단속반'이 상점을 순회하며 가격 인상을 제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급등하는 물가를 잠시 억누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후반에는 더욱 근본적인 물가 안정 대책에 집중했고 1979년 4월, 정부는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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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기밀문서]][[분류:부마항쟁관련]][[분류:호빵이👻]] | [[분류:기밀문서]][[분류:부마항쟁관련]][[분류:호빵이👻]] |
2023년 12월 11일 (월) 20:02 판
배경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의 주요 키워드는 '성장'이었다. 수출입국론의 확산,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GDP 1,000달러 달성, 중화학공업화 등 성장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장'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으며 급격한 경제성장과정 가운데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그 대책 역시 '성장'이라는 주요 목표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나올 뿐이었다. 1970년대 이례적인 세계 경제 대불황<ref>경제위기에 관한 내용은오일쇼크페이지 참조인용 오류: 열린 <ref>
태그가 잘못 만들어졌거나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이 찾아오자 선진국의 공업 생산은 1974년 7월부터 1975년 4월 사이 10%가량 감소했으며 선진국의 생산, 국제 무역량까지 모두 감소했다. 이러한 불황은 한국이 경제 정책 노선을 수정하기에 충분했다. 여태까지 이룩한 것만큼의 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말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행정 규제로서의 물가 안정 정책을 전개하였는데, '물가 인상 단속반'이 상점을 순회하며 가격 인상을 제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급등하는 물가를 잠시 억누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후반에는 더욱 근본적인 물가 안정 대책에 집중했고 1979년 4월, 정부는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