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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월) 16:33 판
이름 | 한국광복군 문장 |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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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약칭은 광복군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정보
- 명칭: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 약칭: 광복군
- 창립: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 해산: 1940년 9월 7일~1946년 5월 말
- 동맹단체: 국민혁명군
- 병력: 339명~564명
- 본부: 중화민국 충칭
- 상위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 참여전투: 한국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중일 전쟁, 버마 전역, 서울 진공 작전(1945년)
한국광복군 선언문
1940년 9월 15일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元年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蔣介石元帥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玆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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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
창설 당시
- 총사령관 : 지청천[1]
- 참모장 : 이범석
- 총무 처장 : 최용덕
- 참모 처장 : 채원개
- 부관 처장 : 황학수
-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 : 안훈[2]
- 훈련 처장 : 송호[3]
- 군무 처장 : 유진동
- 제 1지대장 : 이준식
- 제 2지대장 : 김학규
- 제 3지대장 : 공진원
- 제 5지대장 : 나월환
활동
참여전투
한국의 독립운동
대표적으로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투탄의거를 들 수 있다
- 종로경찰서투탄의거
1. 날짜: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경 2. 장소: 종로경찰서 및 종로 경찰서 일대 3. 내용 :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경 종로경찰서 서쪽 경무계 사무실에서 김상옥이 던진 폭탄이 폭발하여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다. 투탄에 성공한 김상옥은 그날 밤으로 삼파동에 있는 매부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일본경찰에 포위되었다. 이 곳에서 총격전을 전개하여 당시 일본인 형사부장을 비롯하여 일본 경찰 고위 간부들을 저격한 뒤 왕십리를 거쳐 효제동으로 도주, 은신하였다. 그러나 22일 다시 은신처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치열한 총격전을 3시간 동안 전개하다가 마지막 남은 총탄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태평양 전쟁
- 날짜: 1941년 12월 8일 ~ 1945년 8월 일본 항복
- 장소: 진주만 및 태평양, 일본 지역 등
- 특징: 진주만 공습[4]
- 경과: 이미 미국이 중일전쟁 중 중국에 지속적으로 지원을 했었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이미 나빠진 상태였다. 이에 미국이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및 수출을 막아버리자 궁지의 몰린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주둔해 있는 진주만을 기습했고, 이에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소모성 전쟁을 이어가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로 미국이 승기를 잡아갔다. 그러다 1945년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맞으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 태평양 전쟁도 막을 내렸다.
- 결과: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
중일 전쟁
- 날짜: 1937년 7월 7일 ~ 1945년 2차세계대전 종결
- 장소: 북경 서남 교외의 노구교, 남경(난징), 상해 등 중국 각지
- 특징: 남경대학살(난징대학살)[5]
- 경과: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난징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만행과 함께 전쟁 초기 중국을 압도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힘을 합쳐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공합작 군대를 조성해 일본군과 맞섰다. 이후 미국과 소련 등의 연합군이 각각 중국을 지원하게 되면서 점차 중일전쟁은 확대 및 고착화되어 갔다. 이후 1945년 점차 2차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게 되고 미국에게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당하게 되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로 인해 중일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 결과: 일제의 항복으로 종결.
버마 전역
- 날짜: 1942년 1월~ 1945년 7월
- 장소: 버마[6] 전역
- 결과: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버마 전역이란 태평양 전쟁 중 일본 제국이 타이를 출발하여 영국령 인도 제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영국령 버마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을 중심을 미국군과 중국 국민혁명군이 연합군을 이뤘다.
서울진공작전
- 날짜: 1945년 8월 18일
- 장소: 경성부 및 인천
- 별칭: 독수리 작전[7]
- 결과: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
서울 진공 작전은 1945년 8월 18일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미군의 도움을 받아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던 작전이다. 미군의 지원(전투기, 잠수함, 공수 부대 등)을 받기로 했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해체
- 1941년: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다음 해인 1941년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여 “자력(自力)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라는 자주 독립 노선을 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하였다. [8]
- 1946년: 그러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현되어야만 했던 것인데, 실현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에 전후(前後)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지고 말았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 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대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으며, 1946년 6월 해체되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